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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릉군8

광장(匡章): 변법후에 진나라의 함곡관을 격파시킨 불세의 명장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춘추전국시기의 명장을 꼽자면 귀에 익숙한 사람으로는 병성(兵聖) 손무(孫武), 아성(亞聖) 오기(吳起), 그리고 사대명장 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그리고 악의(樂毅), 전단(田單), 조사(趙奢)등이 떠오르고 이들은 모두 사마천이 <사기>에 .. 2019. 1. 3.
거록지전(巨鹿之戰)의 수수께끼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거록지전은 전략적인 결전이었다. 진군(秦軍)과 반진군(反秦軍)의 어느 한측이 승리를 거두면 다른 측은 불가피하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 전쟁사상 보기 드문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저명한 전투는 전체 과정을 보면 통상적인 이치에 맞지 않는 괴이한.. 2018. 2. 16.
진멸위(秦滅魏): 수엄대량(水淹大梁) 글: 왕욱기(王昱祺) 한,조,연의 3국이 이미 멸망했다. 남은 3개의 제후국은 위(魏), 초(楚), 제(齊)이다. 종합적인 국력으로 보면 위나라가 상대적으로 약했고, 거리의 원근을 따지더라도 위나라가 가장 가까웠다. 의문의 여지없이, 진시황이 다음 번에 멸망시킬 제후국은 위나라가 될 수밖.. 2016. 5. 28.
젊고 예쁜 여치(呂稚)는 왜 나이든 유방(劉邦)에게 시집갔는가? 글: 이치아(李治亞) 계속하여 이해가 안되는 일이 있다. 젊고 예쁜 여치가 왜 나이든 유방에게 시집을 갔을까? 부친 여공(呂公)의 한 마디 말로 자신의 혼인대사를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닌가? 여치는 유방에게 시집갈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방은 .. 2014. 1. 15.
신릉군(信陵君)은 왜 평생 실권을 잡지 못했는가? 글: 유연빈(劉宴斌) 모두 알고 있다시피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는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신릉군 위무기(魏无己)와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이 네명은 한때 전국시대의 국면과 진전을 변경시켰다. 다만, 이 풍운을 질타한 바 있는 "사공자"가운데, 한 .. 2013. 4. 26.
평원군(平原君)의 일생최대의 실수는? 글: 유연빈(劉宴斌) 평원군(? - 기원전253년)의 성은 조(趙)이고 이름은 승(勝)이며, 전국시대 조나라의 종실대신이고,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아들이며, 조혜문왕(趙惠文王)의 동생이다. 동무(東武, 지금의 산동성 무성)에 봉해졌고, 호는 평원군이다. 조혜문왕과 조효성왕(趙孝成王) 시기에 .. 2012. 8. 15.
진시황(秦始皇)과 태자단(太子丹)의 관계 글: 아체(阿杕)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부환(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비장한 노래소리는 이천여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흐르고 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형가에 존경을 지니.. 2012. 6. 7.
위(魏)나라는 왜 천하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렸는가? 글: 가동(佳桐) 춘추전국의 역사를 읽다보면 위문후(魏文侯) 위사(魏斯)시대의 위나라를 보면 느끼는 바가 많다. 삼국분진(三國分晋)의 초기에 위문후는 현명한 인재를 널리 기용했다. 자하(子夏),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리(李悝), 적황(翟璜)을 재상으로 삼고, 오기(吳起), 악양(樂羊)을 .. 2011.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