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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16

백숭희(白崇禧)의 부인 마패장(馬佩璋)의 일생 글: 문사왕왕(文史旺旺) "사생계활(死生契闊), 여자성열(與子成說), 집자지수(執子之手), 여자해로(與子偕老)" 이는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시이다. '여자해로'라는 문구는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남녀들이 바라는 바인가? "이득무가보(易得無價寶), 난득유정랑(難得有情郞)"(무가지보를 얻기는 쉽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는 어렵다).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는 쉽다. 그러나 서로 도우면서 인생의 고난을 함께 겪고, 인생의 길에서의 비바람을 함께 막으며 손에 손을 잡고 흰머리가 될때까지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패장(馬佩璋)이다. 현지에서 명망있는 마씨집안의 장상명주이다. 부친 마건경(馬建卿)은 현지의 명망있는 선비였.. 2023. 3. 6.
유종원(柳宗元)의 <어옹(漁翁)>: 천년의 논쟁을 불러온 시 글: 염화몽유(拈花夢遊) 어옹(漁翁) --- 유종원(柳宗元) 어옹야방서암숙(漁翁夜傍西巖宿), 효급청상연초족(曉汲淸湘燃楚竹) 연소일출불견인(煙銷日出不見人), 애내일성산수록(欸乃一聲山水綠) 회간천제하중류(回看天際下中流), 암상무심운상축(巖上無心雲相逐) [직역] 고기잡는 늙은이가.. 2019. 3. 29.
"대명(大明)" 국호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견해 글: 비객방(痞客邦) 명나라의 국호에 대하여 비교적 일찍 주목한 것은 종교관련자이다. 오함(吳晗)이 1941년에 발표한 <명교와 대명제국>일 것이다. 오함은 '대명'의 국호는 한씨부자의 '명왕(明王)' 즉 <대소명왕출세경(大小明王出世經)>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명교는 당.. 2018. 12. 26.
관음보살(觀音菩薩): 중국 여신신앙의 부활 글: 임군영(林君潁) 관세음보살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신이고,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여성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인상의 송자관음(送子觀音) 외에, 불교가 막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의 관음의 이미지는 팔.. 2018. 12. 17.
[황자쟁위술] 광결붕당술(廣結朋黨術) – 막부지낭패(幕府智囊牌) 유오편 기원전21세기경 대우(大禹)가 자신의 아들 하계(夏啓)에게 군왕의 자리를 넘겨준 이후 중국고대 가천하(家天下)의 시대에 역대의 제왕들은 모두 대대손손 영원히 제왕의 자리에 앉아있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왕들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의 종합적인 능력을 길러주어야 했다.. 2015. 8. 4.
십이생초(十二生肖)의 원숭이와 닭: 외(外)와 내(內)의 성상(性狀)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원숭이(猴)는 영장류의 동물이고, 원(猿)와 비슷하나 약간 작으며, 협낭(주머니)와 꼬리가 없다. 우리 인류와 친척관계가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친근한 것처럼 원숭이와도 친근하다. 다만 "원숭이(猴)"라는 글자는 진(秦)나라때 나온.. 2015. 3. 26.
무협소설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 글: 왕로(王路) 이것은 필자의 지난 토요일 김용논검활동의 발언원고이다. 펑황(鳳凰)신문의 클라이언트와 예마(野馬)재경이 주관하여 육신뢰뢰(六神磊磊), 웅태행(熊太行)과 내가 함게 얘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김용소설에서 대협의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였다. 나의 의견은 돈이 어디.. 2015. 2. 10.
하왕조(夏王朝)의 전설은 진실일까? 글: 장경위(張敬偉) 하왕조는 도대체 존재했었는가 아닌가? 이것은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문제이다. 다만 사실은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명확하고 상세하게 이렇게 적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2070년, 선양제의 마지막 수혜자이자 치수영웅인 대우(大禹).. 2014. 10. 7.
중국 고대의 공성전(2): 고대 성지(城池)의 건축특색 중국초기의 성지(城池)는 절대다수가 토축(土築), 즉 흙으로 쌓은 것이었다. 명나라 이후, 각지의 성벽은 비로소 대규모로 벽돌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중국고대역사의 절대다수의 시간동안, 성지는 누런 모양이었다. 일찌기 3천년전인 은상(殷商)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 2014. 7. 17.
왕국유(王國維)의 "육불(六不)" 글: 사비상(史飛翔) 국학대사 왕국유는 학문을 하는데 아주 엄격했고,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일생동안 그와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1909년, 왕국유는 경사도서관의 편집을 맡는다. 나중에 <국학총간>의 기초선언(起草宣言)을 쓰는데, "학술에는 새 것과 옛 것의 구분.. 2014.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