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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당시

유종원(柳宗元)의 <어옹(漁翁)>: 천년의 논쟁을 불러온 시

by 중은우시 2019. 3. 29.

글: 염화몽유(拈花夢遊)

어옹(漁翁)

--- 유종원(柳宗元)


어옹야방서암숙(漁翁夜傍西巖宿), 효급청상연초족(曉汲淸湘燃楚竹)

연소일출불견인(煙銷日出不見人), 애내일성산수록(欸乃一聲山水綠)

회간천제하중류(回看天際下中流), 암상무심운상축(巖上無心雲相逐)


[직역]


고기잡는 늙은이가 밤에 배를 서쪽산의 자락에 정박시키고 유숙한다.

날이 밝은 후에 그는 맑은 상수(湘水)의 물을 마시고 초죽(楚竹)을 태운다

해가 떠오르자 안개가 걷히고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애내가>가 청산녹수의 사이에서 흘러나올 뿐이다.

되돌아보니, 고깃배는 이미 하늘 끝에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고,

바위 위에는 무심한 구름이 서로 쫓아가고 있다.


[논쟁]


유종원이 영주(永州)로 좌천된지 칠년째 되던 해 이 육구소시(六句小詩)를 지었다. 역대시인과 시평가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북송때의 소동파(蘇東坡)는 이 시가 기취(奇趣)로 충만하다고 크게 찬양한다. 그는 <서유자후어옹시(書柳子厚漁翁詩)>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기취(奇趣)'를 종(宗)으로 하고, 반상합도(反常合道)를 취(趣)로 한다. 이 시를 음미해보면 기취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의 두 구는 없어도 된다." 이 말에 숨은 의미는 마지막 두 구는 삭제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송의 유진옹(劉辰翁)은 반대의견을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의 기택(奇澤)은 만당(晩唐)의 류가 아닌데, 바로 뒤의 두 구때문이다." 그후 <어옹>의 마지막 두 구를 삭제해야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역대 이래로 두 가지 의견이 대립했다.


남송의 엄우(嚴羽), 명나라의 호응린(胡應麟), 청나라의 왕사진(王士禛), 심덕잠(沈德潛)등은 소동파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들은 "애내일성산수록"에서 끝내버리면, 끊없는 언외지의(言外之意)를 남길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두 구를 더하면 말을 다 해버리는 것이 되어 여운이 남지 않는다고 본다. 엄우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다: "동파가 후 2구를 삭제했는데, 자후(유종원)이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히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 ㄹ것이다."(<창랑시화>)


반대파진영에는 남송의 유진옹, 명나라의 이동양(李東陽), 왕세정(王世貞)등이 있다. 그들은 삭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만일 마지막 두 구를 삭제해 버리면, 이 시는 만당의 '기취' 시가들과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 두 문구를 삭제하면, 독자들은 쉽게 중점을 시의 예술적인 취미에 두게 되고, 유종원의 당시 처지나 마음 속의 울분을 배출하려는 본뜻은 읽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마지막의 두 구는 삭제하는게 좋을까 놔두는게 좋을까


필자는 비록 소동파의 팬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편을 들 수가 없다. 이건 먼저 육구시라는 형식부터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육구시의 유래]


육구시는 일종의 고시체제이다. 당나라때의 절구(節句)나 율시(律詩)보다 육구시는 더 오래되었다. 그것은 <시경>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고, 위진남북조때 성행했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비록 육구시도 엄격한 운율규정이 형성되었지만, 이미 주류는 아니게 된다. 통상적인 격식을 따르자면, 앞의 4구는 보통의 오언절구 혹은 칠언절구의 격률로 써야 한다. 그리고 대다수는 장면을 서술하거나 의경을 나타낸다. 마지막의 두 구시는 결론과 귀납이다. 심정을 표시하거나 의지를 드러낸다.


육구시의 유래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옹>의 마지막 두 구를 쉽게 삭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두 구를 삭제한다면, 형식이 당나라때 유행한 절구로 바뀌게 될 뿐아니라, 유종원이 표시하려는 본뜻이 사라지게 된다.


[유종원의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유종원은 관료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유학을 숭상했으며, 모친은 불교를 믿었다. 유종원은 어려서부터 유학과 불학의 이중영향을 받는다. 그는 어려서 뜻을 이루어, 21살에 진사가 되어 관료사회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왕숙문(王叔文) 집단에 가담하여 정치혁신을 꾀하고 예부원외랑이 된다. 영정혁신(永貞革新)이 실패하자,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된다. 정치적 이상이 깨져버리고, 관료로서의 앞날도 막혀 버린다. 그리하여 고독과 울분을 발산하는 것이 바로 유종원의 영주10년간 작품의 주제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가성자통(我歌誠自慟), 비독위군비(非獨爲君悲)" "폐축인소기(廢逐人所棄), 수위귀신기(遂爲鬼神欺)"(<곡연주능원외사마>)

"고신루이진(孤臣淚已盡), 허작단장성(虛作斷腸聲)"(<입황계문원>)

"금조불용임하별(今朝不用臨河別), 수루천행변관영(垂漏千行便灌纓)(<형양여몽득분로증별>)


<어옹>도 마찬가지로 고독과 울분에서 온 것이다. 다만 이 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


유종원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주에서의 일거일동을 누군가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을 탄압하고 배제하는 정적들에게 보라고 이 시를 썼다. 나는 영주에서 잘 지내고 있다. 영주라는 곳은 비록 편벽한 시골구석이지만, 나는 자유자재로 잘 지낸다. 마시는 물은 너희들 것보다 맑고 깨끗하며(상수), 밥할 때 때는 것도 너희들 보다 훨씬 더 따져서 좋은 것으로 쓴다(초죽).보는 풍경도 너희들 보다 훨씬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은 하늘도 높고 땅도 넓어서, 내가 인생과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기취해독]


비록 소동파의 <어옹>의 마지막 두 구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소동파의 '기취'설은 숭상한다. 시작부분의 '어옹야방서암숙'은 비교적 평범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급청상'과 '연초죽'은 아취가 넘친다. 거기에는 초범탈속(超凡脫俗)의 의미가 숨어 있어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이다. '연소일출불견인, 애내일성산수록' 이런 장면은 정말 남다르다. 남다른 수법은 원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야 사람이 보이는 것이고, 청산녹수가 보이는 법이다. 유종원의 붓끝에서는 청산녹수에 사람이 있는데, 마치 노래로 그를 불러낸 것같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종원은 '기취'라는 층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풍(古風)에 따라, 뒤의 구 구는 자신의 본 뜻을 나타냈다. 본뜻을 나타내는 것과 부합되도록, 유종원은 형식적으로 일부러 당시 유행하던 절구와 율시를 피했다. 오래된 육구체제를 쓴 것이다. 평측도 아주 마음대로 썼다. 이는 동류합오(同流合汚)하지 않겠다는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