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군영(林君潁)
관세음보살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신이고,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여성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인상의 송자관음(送子觀音) 외에, 불교가 막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의 관음의 이미지는 팔자수염을 기른 서방왕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국불교신상의 조형은 비록 인도에서 건너왔지만, 점점 자신만의 풍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관음불상은 동진(東晋)부터 북주(北周)까지는 비록 여러종면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예를 들어,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등, 여전히 남성위주였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남녀모습은 그저 표상이라고 말하고 관음은 원래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다만 당시에, 관음은 여전히 보편적으로 손에 버드나무가지 혹은 정병(淨甁)을 든 왕자의 형상이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관음은 완전히 여성으로 바뀌어 버린다. 신적고사(神迹故事)이건, 통속문학이건 혹은 벽화나 통속화에서도 관음의 여성화와 본토화는 동시에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무측천(武則天)이 불교사상을 운용하여 여보살상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합리화했다. 즉 무주(武周)가 당(唐)을 대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학자 고정미(古正美)의 연구에 따르면, 무측천은 불교경전 <전신론(轉身論)>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황제에 등극하는 근거로 설득해싸고 한다. 무측천은 이름을 "조(曌)"로 하는데, 이는 더더욱 <화엄경>에서 일신월신(日神月神)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뜻이다(日月當空), 이렇게 자신을 전생한 여보살로 인식시킨다. 무측천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많은 불상이 모두 풍성한 중년부인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천축의 승려인 담무식(曇無識)이 위진십육국중 하나인 북량(北凉)에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번역했고, 경서에 이미 보살이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후 '보살이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5세기후반의 중국에서 상당히 유행한다. 관세음보살신앙도 당나라때 상당히 흥성한다. 다만 무측천이 조상에서의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안ㅎ았다면 그래도 여보살불상이 나타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호기심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왜 중국에 여보살이 필요했을까이다. 중국의 상고신화전설을 뒤져보면, 여신에 대한 기재가 아주 많다. 여와(女娲), 서왕모(西王母)와 항아(嫦娥) 이외에 모두 잘 알고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 "반고개천(盤古開天) "후예사일(后羿射日)", "곤우치수(鯀禹治水)"등 한민족의 전설 혹은 역사는 모두 남성에 대한 기재만 있다. 여신은 어디로 갔는가?
서방학자들이 상고시대를 연구하면서 발견했는데, 많은 원시사회에서는 모두 여신숭배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중국 요녕의 신석기유적지에서 여신 도상(陶像)이 발견되어, "사전(史前) 여신종교숭배는 유럽의 독특한 현상이고 중화문화와 무관하다"는 주장이 깨지게 되었다. 중국신화와 다른 지구의 문명과 비교하면, 신화는 발달하지 않고, 장편서사시도 없다. <산해경>은 전국시대에서 서한초기에 책으로 이루어졌다. 다행히 우리는 한자 상형의 변화를 통해 상고시대 여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학자 섭서헌(葉舒憲)과 송강의(孫康宜)는 초기의 한자(상형문자)를 연구하다 발견했다. "신(神)"이라는 글자에는 특수한 면이 있는 것이다. "신"자는 "시(示)"와 "신(申)"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문(金文)의 "신(申)"자를 쓰면 번개같은 모양이 된다. 학자들이 여러 방면으로 참조하여 알아낸 바에 따르면, "신(申)"은 생명순환을 대표한다. <상서>, <시경>, <순자>. <이아(爾雅)>, <광운(廣韻)>등 사서(辭書)등의 해석에 따르면 "신(申)"을 "중(重)"으로 본다. 그리고 "신(身)"과 "신(申)"은 뜻이 같다. 그렇다면, "중(重)"은 무슨 뜻인가? 한나라때의 유학자 정현(鄭玄)에 따르면, "중(重)"은 "회임(懷妊)"을 말한다고 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신(神)"이라는 글자는 대지의 모친이 계속 자식을 낳고 만물을 기른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신(神)"이 여성을 대표한다면, 왜 그 후에 특별히 여신(女神)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부권사회문명하의 편견때문에 '신'이라는 원래 중성적이고 신성화된 부호를 여성에게서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신'은 원래 '생명재생산'의 뜻을 지녔는데 점점 그 의미가 퇴색하고, 남성의 특허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여신' '신녀'등의 단어가 나타나서 여성적인 신을 부르게 되었다.
상고시대, 중국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가 바뀌면서 여신의 지위도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많은 상고시대에 제사를 받던 여신은 속속 어느 남신의 배우자가 되어버린다. 이는 당시 부계사회의 상황에 부합했다. 그래야 비로소 신화체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와가 복희(伏羲)의 배우자가 되고, 서왕모는 동왕공의, 항아는 후예의 배우자가 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여신은 할 수 없이 성별을 바꾸어야만 했다. 혹은 제사부호의 상징이 약회되어야 했다. 그렇게 원래의 면모를 잃어버린다.
주나라이후에 건립된 부계관념, 그리고 한나라때의 독존유술이후, 은상(殷商)이전의 여신종교와 부녀는 정치무대에서 쫓겨난다. 국가정치에는 남성만 있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인다. 남성신이 중요직책을 관장한다. 다만 이들 이들 남성신만으로는 여성신도의 많은 수요를 만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성신앙이 쇠약해지면서 서방에서 온 관음보살이 마침 그 빈틈을 메워준 것이다. 그리하여 관음보살의 성전환이 이루어진다. 남보살에서 여보살로 바뀐 것이다. 관음보살은 당나라이후 많은 중국본토의 신화고사가 덧붙여지면서, 더욱 중국화, 도교화되어 버린다.
관음보살이 여성화된 후, 다시 중국은 주나라이후 점차 쇠약해지던 여신신앙이 부활한다. 송나라이후의 중국민간신앙에서는 다시 여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마조(媽祖), 벽하원군(碧霞元君)등 신흥여신이 여러 신도의 숭배를 받는다. 향불도 아주 왕성해진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과거 농경이 발달한 사회에서 후대자손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가 여성신도의 갈망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여신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남신이 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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