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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회12

"보경로(寶慶路)3호": 상해 호화주택에 얽힌 이야기 (2) 글: 정내산(程乃姍) 3. "나의 모든 영감은, 모두 여기서 나왔다 -----보경로3호" 서원장은 7살되던 해(1953년) 부모를 따라 회해중로의 중남신촌에서 보경로3호로 이사들어오고, 지금까지 죽 살아오고 있다. 상해100년호화주택역사상, 호화주택내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혹은 보경로3호는 정말 조상의 비호를 받은 것인지, 옛날 호화주택의 거주자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시대에 굴복하여 속속 집을 나가 강호를 떠돌 때도 그는 이 집을 지킬 수 있었고, 새로운 세기의 햇볕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 그의 레코드수집은 보경로3호를 상해의 어느 특정소집단의 거점이 되도록 만들었다. 외국인조차 이렇게 말한다: "만일 상해 보경로3호를 가보지 않았다면, 너는 진정 상해문화를 이해하지 못.. 2023. 4. 18.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2022. 8. 22.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 천진대학의 전신): 중국근대 최초의 대학 글: 매화서향(梅花書香) 중국 근대 최초의 대학 즉 천진의 북양대학(지금의 천진대학 전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895년, 사상유례없던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지 단지 몇달이 지난 후에 천진해관의 성선회(盛宣懷)는 청나라조정에 주청을 올려 천진에 “서학체용(西學體用)”의 북양서학당(北洋西學堂)을 개설할 것을 요청한다. 확실히 패전후에 깊은 반성을 통해, 지방과 중앙정부는 누습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서양식 학당’을 열도록 만들었다. 광서제는 신속히 조서를 내려 허락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국립북양대학당’이라고 불리는 신식 대학이 천진 해대도량원문 밖(지금의 대고로 대영문외 해하중학, 해방남원 일대)의 박문서원(博文書院) 옛 부지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성선회는 학당독판(督.. 2022. 6. 2.
성은이(盛恩頤): 민국제일패가자(民國第一敗家子)는 어떻게 패가망신하였는가? 작자: 미상 청말의 최고부자는 성선회(盛宣懷)이다. 그는 청나라말기의 관료이자 수재출신으로 양무파의 대표인물이다. 저명한 정치가, 기업가이며 자선가이다. 그리하여, "중국실업의 아버지" "중국상부(中國商父)", "중국고등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내용은 그가 호설암(胡雪巖)과 싸워서 이긴 것이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는 패가자를 하나 낳았다. 그것도 민국최대의 패가자를 그 패가망신한 아들의 이름은 성은이이다. 그는 당시 총리 손보기(孫寶琦)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는 도박에 탐닉하고, 호화사치하게 살아 하룻밤에 100채의 집을 날린 바 있다. 말년에는 더더욱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소주 유원(留園)은 성선회가 아들에게 준 개인주택이었다. 청나라말기,.. 2021. 12. 25.
청일전쟁중 평양전투에서의 패배는 "탄진양절(彈盡糧絶)"때문일까? 글: 염극비(廉克飛) 좌보귀(左寶貴)는 평양에서 전사하여 역사에 영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평양전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전사한 후, 섭지초(葉志超)는 부대를 이끌고 5백리를 미친 듯이 도망쳐 중국내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섭지초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백년동안 여론의 비판은 주로 그를 향했고, 섭지초가 담량이 적고 멍청하여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 사건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쓰는 것은 무슨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이라면 좌보귀와 섭지초를 대비하여 평가하면서 하나는 흑, 하나는 백, 하나는 용사, 하나는 겁쟁이로 그릴 것이다. 무대에 올리는 희극이나 소설이라면 그렇게 .. 2021. 7. 21.
손월기(孫越崎): 5.4운동에서 삼협공정반대운동까지.... 글: 왕유락(王維洛) 역사는 만화경이다. 원래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같은 사건,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6.4운동의 폭력진압과 삼협공정의 추진, 5.4운동때 천진의 학생지도자와 북경대학의 교장 채원배, 북양대학에서 제적된 학생과 민국시대의 가장.. 2019. 5. 16.
민국시대 성선회(盛宣懷) 유산분쟁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상해 <신보(申報)>에는 1928년 8월 29일 헤드라인 뉴스가 실렸는데, 제목이 <여자유산상속문제>였다. 이 글에서, "성선회의 일곱째 딸 성애이(盛愛頤)가 형제들이 유산분배시 현행법률을 따르지 않고, 남녀평등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2019. 1. 2.
의화단(義和團)사건을 되돌아본다 (2) - 청나라정부 2. 청나라정부 의화단운동 후기는 청나라정부의 지지와 일정한 관계가 있으므로, 당시의 관청도 '구외배외'로 지목받았다. 아래에는 "협애구외(狹隘仇外)'하는 백성이 있고, 위에는 '맹목배외(盲目排外)'하는 고관이 있었으니, 한바탕의 재난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의화단운동에 대.. 2016. 2. 29.
보과과는 왜 청말난세에 태어나고 싶어했을까? 글: 풍청양(風靑揚) 언젠가 인터뷰에서 보과과는 매체에서 "당신이 가장 살고싶지 않은 왕조는 언제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가장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왕조이전의 그 시대이다. 실제로 많은 왕조에 나는 모두 가보고 싶다. 특히 청말. 비록 국가는 혼란스러웠지만, .. 2013. 11. 10.
청나라말기 두 건의 "일어성참(一語成讖)" 글: 유계흥(劉繼興) 궤이한 역사는 항상 사람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하는 점이 있다. 청나라말기에 발생한 2건의 '일어성참'의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첫째 이야기는 서태후와 관련되고, 둘째 이야기는 부의와 관련있다. 서태후는 청나라말기 동치, 광서 두 황제의 재위기간동안.. 2013.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