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30 유비는 왜 항상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았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유비는 평원상(平原相)이 된 후, 자립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실력과 당시 천하형세로 인하여, 제후들은 부득이 다른 제후와의 합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갈등이 첨예한 적을 상대하고, 다른 제후들에게 병합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제후들이 유비와 합작한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유비는 시종 다른 제후들과의 합작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유비가 평원상이 된 것은 공손찬때문이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우기 때문에, 유비와 청주자사 전해(田楷)는 제(齊)의 딸에 주둔했다. 조조는 서주를 공격했고, 서주자사 도겸이 도와달라고 한다. 전해와 유비는 함께 가서 그를 도와준다. 이때 유비에게는 1천여명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주의 일부 소.. 2020. 10. 20. 원소(袁紹)는 어떻게 기주(冀州)를 차지했는가? 글: 천추원(千秋遠) 삼국시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원소는 수수께끼같다. 그가 관도지전 이후에 보인 모습을 보면 그다지 우수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4개주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당시 전체 천하는 겨우 11개주인데, 그중 4개주를 차지하다니, 그 시대의 최강자가 아니었던가. 그중의 기주는 원소가 성공한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원소는 어떻게 기주를 얻었을까? 이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1. 아무 생각이 없는 행운아 한복 기주라는 곳은 백성도 많고 물산도 풍부한 좋은 지방이다. '천하지중자(天下之重資)'라고 불렸다. 기주목은 자연히 좋은 관직이었다. 기주목 한복은 원래 어사중승이고, 기주는 그와 관계가 없었.. 2020. 10. 13. 원나라 멸망의 원인은....? 글: 장금(張嶔) 원나라 지정6년(1346), 매년 대도(大都)로 쌀 5백만석을 운송하는 대원왕조의 '주동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회통하(會通河)에서 놀라운 일막이 벌어진다. 겨우 40명으로 조직된 마적(馬賊)이 천리 회통하의 양안을 내달리며, 전후로 선박 3백여척을 약탈한다. 풍성하게 약탈품.. 2019. 12. 26. 중국고대의 '명(名)'과 '자(字)' 글: 고건가원(古建家園) 명자(名字, 중국에서는 '이름'이라는 뜻으로 쓰임)는 개인의 부호표시이다. 사람과 사람간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쓰는 칭호이다. '명자'는 대부분 간단하다. '성(姓)'과 '명(名)'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혈연관계를 나타낸.. 2019. 8. 25. 춘추(春秋)시기 주나라(周) 이외에 칭왕(稱王)한 제후국은?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춘추시기는 기원전770년(주평왕원년) 주평왕이 동천하여 동주(東周)를 시작한 그 해로부터, 기원전476년(주경왕44년) 전국전날까지 모두 295년간을 가리킨다. 일설에는 기원전453년, 한, 조, 위가 지씨(智氏)를 멸한 때까지로 보고, 일설에는 기원전403년 삼가분진때까.. 2019. 5. 28. 여포의 처는 누구일까? 글: 이치아(李治亞) 일반적으로 여포의 처는 초선(貂蟬)이라고 알고 있다. 여포가 초선을 희롱하는 장면은 아주 유명하다. 즉, 사도 왕윤이 자신의 의녀(義女)인 초선을 여포에게 주겠다고 하고서 그 딸을 동탁(董卓)에게 바친다. 이렇게 계책을 써서 여포와 동탁의 불화를 조장한다. 여포.. 2019. 5. 27.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