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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15

건륭제는 왜 재덕을 겸비한 황십일자(皇十一子) 영성(永瑆)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았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강희제 말년의 구자탈적(九子奪嫡)과 비교하면, 건륭제 말년의 후계자선택은 범위가 넓지 않았다. 그가 너무 오래 살아서, 대다수의 황자는 이미 사망했다. 17명의 황자들 중에서 겨우 4명만 남았다. 바로 황팔자(皇八子) 영선(永璇), 황십일자 영성, 황십오자 영염(永琰) 그리고 황십칠자 영린(永璘)이다. 이 네 명의 황자들 중에서, 황팔자 영선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고, 황십칠자 영린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후계자에서 제외된다. 결국 남는 것은 영성과 영염의 두 황자이다. 재능으로 따지면 영성은 서화(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옹방강(翁方綱), 유용(劉鏞), 철보(鐵保)와 함께 건륭조 4대서예가로 꼽힐 정도이다. 명실상부한 대재자(大才子)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재.. 2021. 2. 7.
장개석의 사무실에는 왜 책이 한권도 놓여 있지 않았을가? 글: 진관임(陳冠任) 지도자로서 장개석의 사무실은 세계각국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책 한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책을 한권도 놓아둔 적이 없다. 3,4십년대 중경(重慶)에 있을 때, 장개석은 두 개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나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다른 하.. 2019. 3. 21.
건륭의 후손과 북경의 왕부 글: 장월(張月) 건륭제는 자녀가 아주 많았다. 제왕가에서 태어난 이들 황자와 공주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황실 구성원으로서 그들은 북경성 내에 많은 왕부(王府)를 건설한다. 수백년의 풍운과 변화를 거쳐 어떤 왕부는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수백년의 지난 이야기.. 2018. 11. 22.
건륭제는 왜 6번이나 강남으로 내려갔는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 300년역사중에서 단지 2명의 황제만이 6번 강남을 내려갔다. 한 명은 강희제이고, 다른 한명은 그의 손자인 건륭제이다. 강희제가 강남으로 6번이나 내려간 것은 국계민생을 위해서였고, 적지 않게 실질적인 일들을 했다. 그러나, 건륭제가 6번 강남으로 내.. 2018. 2. 4.
징기스칸 사망의 수수께끼 글: 노리람사(老李覽史) 명나라때의 일대명신 송렴(宋濂)은 <원사(元史)>에서 단지 스무 글자로 일대천교 징기스칸이 사망한 과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문자는 너무 간략하여 명확하지가 않다. 그래서 후세에는 줄곧 징기스칸이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징기스칸의 .. 2015. 5. 3.
"황제의 침실이 10평방미터를 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글: 주해빈(周海濱) 최근에 <왜 황제의 침실은 10평방미터를 넘지 않았는가?>라는 글이 널리 알려졌다. 내용은 이렇다. 고대의 풍수이론에는 "집이 크고 사람이 적으면, 흉가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왜냐하면 집이 크면 사람의 기운을 많이 빼앗는데, 한 사람이 큰 집의 공간의 에너지.. 2014. 3. 2.
주세종(周世宗)은 외계인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글: 단전룡(段錢龍) 양한(兩漢, 동한과 서한)이래, 유가문화가 점점 정통의 지위를 차지한다. 비록 고대서적에 귀괴신마(鬼怪神魔)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기는 해도, 정통문인의 글에서는 공자의 말씀에 나오는대로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한다"는 태도를 지켜왔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를 .. 2014. 1. 14.
우성룡(于成龍): 강희제때 동명이인의 두 봉강대리(封疆大吏) 글: 유계흥(劉繼興) 청나라 강희제때, 동시에 활약한 두 명의 우성룡이라는 독무대원(督撫大員)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성과 이름이 같을 뿐아니라, 함께 관직에 있었다. 또한 전후로 직예순무(直隸巡撫)를 맡았고, 사후에 모두 현량사(賢良祠)에 입사된다. 이 두 사람중 한 사람은 "천하.. 2014. 1. 14.
<사고전서>에 서양서적을 실은 이유는? 글: 포강객(浦江客)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건륭37년(1772년)부터 시작하여 10년가량의 시간을 들여, 대량의 인력물력을 들여 편찬한 대형 총서(叢書)이다. <사고전서>는 많은 유학자, 한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완성한 건륭제가 친히 정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건륭가경연간의 고거학(.. 2013. 2. 4.
200년 서하국(西夏國)은 왜 사서(史書)를 남기지 않았는가? 글: 조염(趙炎)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대왕조는 모두 사서를 쓰는 관례가 있었다. 조정에는 전문적인 부서를 두어 사관을 임명하여, 전왕조의 역사를 편찬하고, 본왕조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기>>에는 제선왕과 사관이 싸우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사관은 제선왕의 황당한 짓들.. 2010.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