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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불발상8

진시황의 왕후는 어느 나라출신이었을까? 글: 해숙설춘추(海叔說春秋) 사서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진시황의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소위 진황한무당종송조(秦皇漢武唐宗宋祖)중 나머지3명의 왕후에 대하여는 모두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군주임에도 왕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현존하는 사서에서는 진시황의 황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왕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추측해보는 것은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진시황의 앞 3대 즉, 진소양왕(秦昭襄王), 진효문왕(秦孝文王), 진장양왕(秦莊襄王)을 살펴보면, 진시황 가족내의 미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진소양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초나라여인 미팔자(羋八子, 羋月)이고, 진효문왕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이다. 이 두 명은 .. 2022. 7. 5.
진시황릉의 허실(9): 진시황은 현지에 매장하는 것이 현명한 조치이다.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이 만일 함양에서 죽었다면, 역대제왕이 경성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항상 마련해둔 냉장된 보관장소가 있고, 궁내에는 장례활동을 치르는데 필요한 각종 도구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비불발상'을 할 때, 궁문을 걸어잠그고, .. 2018. 2. 7.
진시황릉의 허실(8): 비불발상(秘不發喪)은 조건이 필요하다. 글: 진경원(陳景元)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진시황응 여산에 묻었다(葬始皇驪山)"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황제가 붕어하니, 교산에 묻었다(黃帝崩, 葬橋山)"이라는 기록도 있다. 섬서성의 황제릉은 비록 매년 대형제사활동을 벌이지만, 사람들은 그 무덤의 진실성에 대하여 계속하여.. 2018. 2. 7.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 교조모위패(矯詔謀位牌) <사기.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제도를 정하게 명하고, 승상 위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는 백관들과 협의한 후, “….황제의 명은 제(制)로, 황제의 영은 조(詔)로 한다.”는 원칙을 정한다. 그 후 황제의 영은 “조서(詔書)”라 부르고, 특히 그 .. 2015. 7. 27.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전환 글: 왕립군(王立群) [<여후>수정판서문] <여후>의 재판을 곧 낸다. 신판 <여후>에는 문자를 좀 늘였다. 대체로는 2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원서의 내용을 보충한 것이고, 둘은 고적 원문을 증가시킨 것이다. 현재, 대중역사 읽을거리가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적원문.. 2014. 1. 29.
한고조 유방의 유언 분석: 환환상구(環環相扣), 백밀무일소(百密無一疎) 글: 하목풍(何木風)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모두 그를 쳐라." ---<사기.여태후본기> "여후가 고조에게 물어 말하기를: 폐하가 세상을 떠난 후 소상국이 죽으면 누가 대신합니까. 황상이 말하기를: 조참이 괜찮다.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왕릉이 괜찮다.. 2013. 12. 21.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추리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의 사후 3개월동안 온량거(轀輬車)에 놓아두고, 매장도 하지 않고 장례도 치르지 않으면서,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여산(驪山) 북록의 능묘에 묻혔다는 주장은 통상적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시신이라도, 엄격한 냉동, 방.. 2012. 9. 20.
황제사후 비불발상(秘不發喪)의 비밀 글: 대지약(大智若) 일세를 풍미하고, 권력을 독단,전횡하며 풍운을 질타했던 황제가 죽은 후에 시체가 썩을 때까지 그냥 놔두고 장례식을 치르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이들 제왕의 시체에는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제환공의 경우 공자소백(公子小白)이 계모를 써서 왕위를 .. 2012.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