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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15

촉한(蜀漢)의 멸망에 책임있는 4명의 인물은...? 글: 초급칠품소지마관(超級七品小芝麻官) 촉한의 멸망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잘못을 유약하고 무능한 유선(劉禪)의 책임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유선이 투항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그외에, 또 어떤 사람은 촉한멸망의 원인을 제갈량(諸葛亮)에게서 찾는다. 제갈량이 여러번에 걸쳐서 북벌하였기 때문에 촉한의 국력을 대거 소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촉한을 심연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제갈량도 아니고, 유선도 아니다. 진정한 책임자는 기실 다음의 네 사람이다. 그 네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겠는가? 모든 촉군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확실히 유선이다. 다만 당시의 유선은 기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등애(鄧艾)가 면죽(綿竹)을 함락시킨 후, 전체 촉한의 조정은 이미 아무도 감히 싸우자.. 2023. 5. 15.
제갈량 제1차북벌의 처참한 실패: 11명의 주요장수를 잃다.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삼국을 얘기하려면 제갈량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을 얘기하려면 그의 북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은 일생동안 촉을 위하여 간뇌도지(肝腦塗地)했고,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세세한 일까지 직접 챙기는 그는 결국 제5차북벌의 길에서 병사하고 만다. 그렇게 촉한은 경천지주(擎天之柱)를 잃고 얼마후 촉한은 멸망하고 만다. 기실 제갈량의 수차례에 걸친 중원북벌중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것은 제1차이다. 마찬가지로 손실이 가장 참혹했던 것도 제1차북벌이다.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이 제1차북벌에서 11명의 장수를 잃은 것만 보더라도 제1차북벌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차북벌의 배경 관우가 맥성에서 패주하며 목숨을 잃은 후, 유비.. 2023. 2. 28.
제갈량은 제1차북벌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패배했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삼국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로서 유비가 전투,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다. 제갈량을 얻은 후, 유비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했고, 속이 좁은 관우의 불만을 초래하게 된다. 유비는 임종때 탁고(托孤)할 때, 제갈량은 여전히 그를 위해 촉국을 지켜줄 유일한 후보자였다. 비록 그는 제갈량에 대하여 마음을 높지 못하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조정과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겨야 했고, 여기에 이엄과 조운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감시하여 유선과 촉한강산을 보호하게 했다. 다행히 제갈량은 확실히 그가 유비에게 약속한대로 일을 했다. 충성을 다하면서, 유비가 실현하지 못한 이상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유선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자신이 죽은 후 능력이 부족한 유선.. 2022. 8. 18.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 2022. 3. 9.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일곱번이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붙잡은 후, 잘 먹이고 대접한 다음 보내주고 다시 싸운다. 맹획은 결국 제갈량에게 완전히 굴복한다. 그때부터 촉의 남쪽에 있는 소수민족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갈량과 맹획은 마치 민족융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아름다운 한쌍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럼 실제 상황이 그러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사망하기를 전후하여, 익주의 남부지역에서는 여러번 반란이 일어난다. 유비의 후사를 처리한 후, 관료들을 정돈하여 조정의 상하관계를 바로잡은 후 제갈공명은 남부지역에 손을 쓰기로 한다. 다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동오와의 연합 유비가 .. 2021. 10. 23.
관우가 형주를 지킬 때, 그의 문신무장(文臣武將)은 누가 있었을까? 글: 이치아(李治亞) 유비(劉備)가 형주를 차지한 후, 서천(西川)을 칠 때, 제갈량(諸葛亮)으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한다. 당시 형주에는 많은 명장이 있었다. 제갈량이 형주의 수비총사령관이고, 관우(關羽)는 양양(襄陽)의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장비는 영사군순강(領四郡巡江)이었고.. 2018. 7. 21.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역사적 사실인가? 글: 이자지(李子遲)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음 명청(明淸)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연의>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중 하나이다. 여기에 앞의 '실가정(失街亭)'과 뒤의 '공성계(空城計)'까지 합쳐서 3부분을 합치면 희곡(특히 경극) 무대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대표적인 .. 2018. 5. 8.
반초(班超)는 어떻게 서역(西域)을 종횡할 수 있었을까?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동한(東漢)때 반초가 서역에 사신으로 나가서, 서한(西漢)의 장건(張騫)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중국과 서방을 잇는 통로를 개척한다; 그리고, 서역을 30여년간 지켜낸다. 이렇게 하여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한나라에 신복(臣服)한다. 반초의 이런 공적은 그.. 2018. 2. 1.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진상 글: 생활문적(生活文摘) 마속의 죽음을 얘기하자면, 역대이래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街亭)의 패배이후, 제갈량의 본영으로 돌아와 부형청죄(負荊請罪)한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다. 경극 <실가정(失街亭)>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이런 인상은 기실 나관중의 <삼.. 2015. 2. 13.
제갈량은 위연을 어떻게 배척하고 탄압했는가? 글: 호각조(胡覺照) 위연은 유비집단의 철간(鐵杆)중 하나이다. 일찌기 유비가 탁주(涿州)에서 무장을 조직하여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위연은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즉 유비집단의 철간중 한 명이다. 이는 유비의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219년,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 2015.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