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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11

왜 이전에는 장진호(長津湖)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작자: 운(雲) 한국대통령 윤석열이 4월 27일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해병대가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의 공헌을 찬양했다. 윤석열의 연설은 장진호전투를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장진호전투에 관해서 몇가지를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첫째,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0년전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은 장진호전투를 몰랐다. 이건 무엇때문이었을까? 먼저 유백승(劉伯承) 원수가 장진호전투에 대하여 평가한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병단(兵團, 3개軍)이 한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댓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추어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 유백승 원수.. 2023. 5. 18.
<유지단(劉志丹)>: 소설 한권으로 6만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중공중앙선전부는 공인출판사(工人出版社)에 '중공열사' 유지단에 관한 책을 출판할 것을 요청했고, 공인출판사는 유지단의 제수(弟嫂)인 이건동(李建彤, 리젠통)에게 집필을 부탁한다. 1962년 여름, 6차례나 원고를 수정한 소설 이 , , 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옛날 유지단과 충돌이 발생한 바 있는 윈난성위 제1서기 염홍언(閻紅彦, 얜홍얜)이 이의를 제기하여 연재가 중단된다. 염홍언은 반대의견을 중공중앙에 제출한다. 염홍언에 따르면, 소설 에 나오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인물은 고강(高崗, 가오강)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 소설은 "고강"의 명예회복을 위해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고강은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중 한명이다. 1940년대 연안정풍때 염홍언은 중공고위층에 고강의.. 2023. 2. 28.
중국은 왜 항상 "국내외적대세력"을 들고나올까? 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수십번에 걸쳐 피비린내나는 정치운동을 발동시켰다. 매번 정치운동때마다 중공에 숙청당한 대상은 모두 중공에 의해 "국내외적대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칭해졌다. 즉,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 혹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이라고 규정되었다. 고요(高饒)는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54-1955년 중공은 당정후 첫번째 반당집단을 규정했다. "고강(高崗),요수석(饒漱石)반당연맹"이다. 고강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 국가계위주석이었고, 요수석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었다. 고요는 중공에 의해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영도핵심을 '전복하기를 기도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영도권을 찬탈하고자' 했다고.. 2022. 12. 11.
"고요반당연맹(高饒反黨聯盟)"중 고강(高崗) 자살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8월 17일, 당시 중공정치국상위,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사위부주석, 국가계획위원회주석 고강(高崗)이 대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다. 향년 49세이다. 고강은 중공건정후 부국급(副國級) 고관으로 자살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고강은 왜 자살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억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중공에 큰 공을 세웠다: 드는 중공 섬북(陝北)근거지의 창업자중 한명이고, 모택동등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섬북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국공내전기간동안 그는 동북으로 파견되어 동북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고, 가장 '선진'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1950년,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그가 이끄는 동북은 가장 중요한 군수기지가 된다; 1952년.. 2022. 9. 6.
리루이(李銳) 서거: 왜 중국정부는 긴장하는가? 글: 정암(貞巖) 중국의 고위관료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한편으로, 중국정부는 높은 격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백의 민중이 북경에 모여서 고별행사를 벌인다. 일부는 손으로 쓴 표어를 들고 리루이에게 경의를 표했고, 혹은 그.. 2019. 2. 28.
왕뤼린(王瑞林): 중국 최후의 '감군(監軍)' 글: 임염(荏苒) 사람의 인생에서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귀인'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이약용문(鯉躍龍門)할 수도 있다. 화궈펑(華國鋒), 왕둥싱(汪東興), 후차오무(胡喬木)가 모택동에게 그러했고, 리더셩(李德生)이 주은래에게 그러했고, 왕뤼린이 등소평에게 그러했다. 1952년 22.. 2018. 12. 17.
중국의 한국전참전결정의 경위 글: 역사학인(歷史學人) 1950년 9월 15일, 한국전쟁의 국면이 완전히 바뀐다. 미군 맥아더원수의 지휘하에 미군 7만여명, 500여기의 비행기, 260척의 군함이 협력하여 인찬상륙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포위한다. 9월 16일, 낙동강전선의 한미군 10개사단이 대거 반격을 시작한다. 미군.. 2018. 7. 28.
고강(高崗)의 권력은 어떻게 유소기와 주은래보다 커지게 되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모택동은 당의 과도시기총노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최소한 신세제풍파가 발생한 1953년초에는 모택동이 유소기와 주은래의 일부 언행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따라오는 고강은 비교적 좋아한다.. 2015. 5. 30.
"사서(史書)"와 "사실(史實)"의 진위 글: 소화(韶華) 1. 진실한 역사를 쓰기는 어렵다. 옛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또한 말한다.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다" 승리자가 역사를 쓰면 항상 자신의 좋은 점을 드러내고, 자신의 나쁜 점은 회피하고자 한다. 당대왕조의 사.. 2014. 4. 29.
중공의 6.25참전 의사결정경위 글: 사마량(司馬亮)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이며, 살아남고 망하는 것이 갈라지는 길이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예상치도 못하게 발생한 한국전쟁은 새로 건국하여 할 일이 많던 신중국에 있어서,.. 2011.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