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274

지미 라이(黎智英): 지오다노와 애플데일리(蘋果日報)의 창업자 글: 이용(李勇) 작년 6월 21일, 홍콩의 Beacon Hill(筆架山)에는 큰 플랭카드가 걸렸다: "중공이 지미라이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中共計劃暗殺黎智英)". 폭은 개략 2미터가량이고 길이는 20미터였다. 주룽당(九龍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홍콩사람들은 모두 안다. 지미라이는 중공정권의 눈엣가시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가 발행하는 인기신문 '애플데일리'는 홍콩의 반공신문이기 때문이다. 지미라이는 중공의 탄압에 맞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직접 미국의 백악관으로 가서 트럼프 정권의 부통령 펜스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홍콩반송중운동 및 일체의 중공정권에 대한 항의시위대에도 참가하여, 중공은 그에게 '서방적대세력의 매판이자 주구'라고 비난한다. 그후에 신비인물을 보.. 2021. 6. 29.
"홍콩수렁"에 빠진 베이징 글: 공고봉(孔誥烽) 홍콩의 민간과 정부는 찬바람이 부는 한겨울을 맞이했고, 확실히 살아가기 힘들다. 금년이 "6.4"나 "7.1"도 아마 조용히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각도를 바꾸어 베이징의 시각에서 홍콩을 보면, 그들이 홍콩에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베이징은 지금 홍콩수렁에 빠져버렸다. 옛날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에 빠진 것이나, 소련이 아프간 수렁에 빠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옛날 월남전과 아프간전쟁에서 수퍼대국이 사용하는 무기를 계속하여 강화했고, 전국민에 대하여 무차별공격을 가했지만, 어쩧게 해도 적을 모조리 소탕할 수 없었고, 점점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포위당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조함에 광란에 빠지고, 결국 스스로가 모든 사람이 적이라고 생.. 2021. 5. 1.
2021년 홍콩에서의 중공 내부투쟁은 계속된다. 글: 종원(鍾原) 중공은 홍콩에서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민주파를 극력 탄압하고, 홍콩인의 자유를 박탈하며, 미국의 제재를 약화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중공 고위층의 압력은 실제로 상당히 크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공 고위층은 여전히 홍콩의 대륙화를 가속화하고 있고, 홍콩을 직할시로 변경시키고자 시도한다. 당연히 홍콩의 민주항쟁이 내지로 확산되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외에, 중공은 홍콩에서 또 하나의 골치거리가 있다. 즉 중공내부에 일부사람은 여전히 홍콩을 내부투쟁의 기지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반시진핑파의 핵심거점이라는 것이다. 시진핑은 홍콩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왔다. 2019년 홍콩에서의 '반송중'시위기간동안 반시진핑파는 계속하여 불난 집에 불을 붙여, 시진핑을 난감.. 2021. 1. 4.
HSBC사태: 후이치펑 계좌동결 후폭풍 글: 구청자(求淸者) 홍콩의 HSBC은행은 이틀전, 돌연 영국에 망명한 홍콩 입법회 의원 후이치펑(許智峰, Ted Hui Chi-Feng)과 그의 가족이 가진 은행계좌를 모조리 동결히 버렸다. 그리하여 후이가족은 영국에서의 자금줄이 끊어져 버렸다. 국제적인 상업금융기구로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임의로 고객의 계좌를 동결시켜 버리다니, 이는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한 것일 뿐아니라, 홍콩이 여러 해동안 힘들게 쌓아온 금융중심의 양호한 명성도 하루아침에 금이 가게 되었다. 이 사건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HSBC가 저지른 세 가지 죄때문이다: 첫번째 죄, 고객의 사유재산권은 보호받아야 한다. 고객이 계좌를 개설하는 것은 은행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고, 은행으로 하여금 개인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 2020. 12. 8.
천하총림사절(天下叢林四絶): 중국의 사대명사(四大名寺) 글: 서미견문(西米見聞) 중국은 지역이 광활하다. 세계에서 면적이 세번째로 넓다. 동시에 중국은 상하 오천년의 역사가 있고,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 전국 내지 전세계에서 유명한 만리장성, 병마용 등등. 동싱 봉건사회때의 많은 사묘(寺廟)도 있다. 모두 장관이다. 고대에 지위가 높은 건물은 많은 것이 사묘이다. 비록 많은 사묘들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 소개할 것은 중국의 사대명사이다. 사서에서는 천하총림사절이라고 부르며, 모두 천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네개의 사묘는 바로 영암사(靈巖寺), 국청사(國淸寺), 옥천사(玉泉寺)와 서하사(棲霞寺)이다. 이 네 개의 사묘는 사료에 모두 기록이 있다. 천하총림사절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유명.. 2020. 11. 22.
설두산(雪竇山): 불교제5대명산 글: 성시소당(城市小堂) 중국의 불교계에는 4대명산이 있다. 그것은 각각 산서 오대산, 절강 보타산, 사천 아미산 및 안휘 구화산이다. 각각 문수보살, 관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의 도량(道場)이다. 동시에 중국의 유명한 관광지이다. 닝보(寧波)에도 저명한 불교명산이 있다. 사람들은 앞에 언급한 4대명산과 나란히 취급하여, '중국5대불교명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기는 바로 닝보 봉화(奉化)의 설두산이다. 설두산은 봉화의 계구진(溪口鎭)에 있고, 미륵보살의 도량이다. 이 산은 해발 80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명제일산(四明第一山)"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이 칭호는 장개석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산에는 기봉이석(奇峰異石)이 있고, 현애비폭(懸崖飛瀑)이 있어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설두산.. 2020. 10. 18.
"취백지(醉白池)": 9백년된 상하이(上海) 최고(最古)의 원림(園林) 글: 주걸(朱桀) 강남원림(江南園林)을 얘기하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길은 소주원림(蘇州園林)으로 돌릴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주원림이 나오기 때문에 선입견이 되었다. 원림이라고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소주를 떠올리고, 소주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원림의 도시'라는 명칭을 지닌 소주의 경내에 사가원림은 기원전6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고, 청나라말기 성내외의 원림은 모두 170여곳에 이르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곳도 50여곳에 이른다. 그중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을 대표로 하는 고전원림은 "지척지내재조건곤(咫尺之內再造乾坤)"이라는 평을 듣는다. 중화원림문화의 자랑이자 대표작이다. 기실, 강남원림은 소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해에도 여러 원림이 있다. 상해시 경내에, 우리가 가장 잘.. 2020. 10. 9.
홍콩의 "삼권분립" 논쟁 글:BBC中BB 홍콩 교육국장 케빈 융(Keven Yeung Yun-hung, 楊潤雄)이 홍콩의 정치구조는 '삼권분립'이 없다고 한 후, 다시 홍콩행정장관 캐리람(Carrie Lam Cheng Yuet-ngor, 林鄭月娥)이 동조하면서 다시 번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캐리람은 9월 1일 매주 열리는 정례정부회의전에 기자를 만나 홍콩의 행정, 입법과 사법기관은 각자 자신의 직무를 하는 것이며, 3자가 상호 견제와 균형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삼권분립은 없다고 말했다. 이 논쟁을 불러온 원인은 홍콩교육국이 현재 상식교과서를 심의하면서 '삼권분립'의 내용을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8월 31일 교육국 국장 케빈 융은 홍콩에 삼권분립이 없으므로 이런 사실을 반드시 교과서에 분명히 써놓아야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2020. 9. 3.
자금성(紫金城)의 신수(神獸) 작자: 미상 모든 동물이 자금성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궁건축의 서로 다른 위치에는 상서로운 신수들을 놓아두었는데, 진택화살(鎭宅化煞), 구사영샹(驅邪迎祥)을 표시한다. 그리고 수백년동안 같은 자세로 있으면서 집요하게 금구영구(金甌永固), 복수영년(福壽迎年)을 나타낸다. 태화전(太和殿) 앞의 동사(銅獅) 청동으로 만들었고, 아주 정교하다. 아름다운 하얀 대리석 위에 놓여 있다. 정전(正殿)을 지키는 의미를 가진다. 오른쪽의 숫사자는 수구(繡球)를 오른발아래 밟고 있는데, 이는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의 암사자는 왼발의 앞에 어린새끼를 데리고 놀고 있는데, 그 뜻은 자손이 창성하라는 것이다. 태화전 앞의 선학(仙鶴)과 동귀(銅龜) 단지(丹墀) 위에 운학(雲鶴)이 서 .. 2020. 8. 31.
홍콩밀항의 역사 글: 관령(關嶺) 1977년 11월, 등소평이 광둥을 시찰했다. 광동성위에서 보고하던 중 홍콩밀항붐에 대하여 말하자, 등소평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것은 우리의 정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군대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편전쟁후,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홍공과 내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많은 내지인들에게 홍콩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피난처로 여겨졌다. 청말민초의 정권교체기에 많은 내지인들은 홍콩으로 이민간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무수한 내지인들이 홍콩으로 들어간다. 홍콩이 함락된 후, 음식부족으로 많은 홍콩주민은 내지로 도망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수십만이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후 국공내전으로, 많은 내지의 난민들이 다시 홍콩으로 간다. 홍콩에 .. 2020.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