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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파촉(巴蜀)의 권력게임: 유장(劉璋)은 왜 유비(劉備)를 불러들였을까?

by 중은우시 2024. 8. 30.

글: 서북낭(西北狼)

만일 삼국시대 군웅들중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순서를 매긴다면, 원술을 2위로 한다면, 익주목 유장을 1위라고 해야할 것이다. 유장은 인랑입실(引狼入室)한 것때문에 그후 천년이상 후세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아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아마 우리도 그보다 그다지 총명하지 않을 것이다.

  1. 동주병(東州兵)과 본토파(本土派)의 싸움

유장의 내력을 확실하게 알려면 우리는 그의 부친 유언(劉焉)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유언은 한나라말기 가장 만저 한나라가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중 한명이다. 그 겁난을 피하기 위해, 유언은 한영제(漢靈帝)에게 폐사입목(廢史立牧, 자사를 없애고 목을 설치하자는 것)을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 조치는 지방장관의 권력을 극도로 확장하는 것이고, 나중에 군벌할거의 판도라상자를 연 셈이 된다.

유언은 처음으로 그 이득을 본 사람이다. 자신이 교주목(交州牧)의 직위를 얻는다. 교주는 지금의 광동, 광서와 월남일대이다. 한나라말기는 이미 말세였고, 사료에 따르면, "유언은 교주목을 원했는데, 이는 세상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유언이 떠나려고 준비할 때, 또 다른 한나라가 끝장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사천사람 동부(董扶)가 그를 찾아와서 말한다. 사천은 천자의 기운이 넘치는 곳인데, 어르신이 그곳을 차지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유언은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속에서 욕심의 불씨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마침 당시의 익주자사(益州刺史)는 폭정을 펼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게 했다. 한영제는 유언을 다시 익주목(益州牧)을 맡게 한다.

사천의 황건적은 자사를 죽인 후, 금방 현지의 가룡(賈龍), 임기(任岐)등에게 평정당한다. 사천은 본토파가 장악하는 상황이 된다.

당시의 이런 상황하에서 유언이 그곳으로 갔으니, 천자를 노리는 것은 말도 안되고, 중도에 '사고'라도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하늘은 사람의 길을 모두 막지는 않는다. 당시 관중(關中), 양주(凉州)일대의 호족들은 매년 계속되는 전란에 살아가기 힘들게 되자, 무리를 이루어 사천으로 이주하게 된다. 유언은 그 기회를 잡아 이들을 거두어, 동주병(東州兵)을 조직한다.

처음에 유언의 실력은 현지세력에 맞서기 어려웠다. 가룡등이 그가 사천으로 들어오도록 놔둔 것은 주로 유언 휘하의 사천사람 동부, 조위(趙韙)등이 중간에서 알선한 때문이다.

유언이 사천에서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원자근지(遠者近之), 천자귀지(賤者貴之)"의 책략을 쓴다(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비천한 자를 귀하게 대우한다). 처음에 사천에서 주변에 밀려나 있던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막 진압당한 황건군이다. "무납이반(撫納離反), 무행관혜(務行寬惠), 음도이계(陰圖異計)"(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다독이고 받아들이고, 관대하고 혜택을 주는 정책을 취했다. 이는 속으로 다른 계획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두미교(五斗米敎)도 있다. "장로모시이귀도(張魯母始以鬼道), 우유소용(又有少容), 상왕래언가(常往來焉家)"(장로의 모친 노씨는 귀신에 관한 일을 잘 알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색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자주 유언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하여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삼아 한중에 거처하게 하면서 곡간을 막고 한의 사신을 죽인다.

가룡등이 위험함을 느끼고 조치를 취하려고 할 때, 이미 유언의 칼이 그들의 목을 베었다. "왕함(王咸), 이권(李權)등 십여명을 죽여서 위신을 세운다. 건위태수(犍爲太守) 임기와 가룡은 반격했고, 유언은 임기, 가룡을 죽여버린다."

이때부터 유언은 외래세력과 사천의 반사회무장세력의 지지를 받아, 본토세력을 억누르고, 사천에 자리를 잡는다.

2. 사천정국의 반전

194년, 유언은 창업도중에 사망한다. 그는 생전에 익주목의 자리는 아들 유모(劉瑁)가 승계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때 창업원로 조위등은 다른 생각을 품는다. "주의 고위관료 조위등은 유장이 온유하고 인자하기 때문에 유장을 익주자사로 모셨다." 즉, 이들은 유장이 '온유하고 인자하다'는 명목을 들어 옛주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익주목의 자리를 유장에게 넘기게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온유하고 인자하다'는 것은 '마음대로 굴기 좋다'는 뜻이다. 역사상의 인종은 모두 신하들에게 엄청나게 추앙받는다. 그건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유장이 익주목에 오른 후, 사천현지인 심미(沈彌), 누발(婁發), 감녕(甘寧)은 형주의 유표와 연락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최종적으로 유장은 조위와 부친이 남겨놓은 동주병으로 이들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조위와 동주병이 있다면 유장은 그저 유선처럼 살아갈 수는 있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유언의 동주병은 유비의 형주파가 아니다.

형주파는 유비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충성을 다했다. 그것은 그들이 "선제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 폐하에게 보답하고자 한다"는 것이 있었고, 형주파의 이런 충성은 유비의 인격적 매력때문이고, 수십년을 하루같이 어렵게 경영하여 아들에게 물려준 무형의 자산이다. 그러나 유장은 그런 복이 없었다.

동주병은 유언과 강력한 개인적인 의존관계에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그들간의 관계는 조조와 청주병과 같다. 이들은 무슨 위나라, 무슨 조씨가문은 모르고, 그저 조조라는 보스만 인정했다. 조조가 죽고나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각자 자신의 보스를 찾았다. 조비는 보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장은 취임한 후, 자신이 이들 동주병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무기를 믿고 자주 사천의 인민들을 괴롭혔다. 본토출신의 조위도 통제가 되지 않았다.

201년, 더 이상 동주병이 고향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참지 못하게된 조위는 제2의 감년이 된다. 그는 다시 한번 형주의 유표와 연락하여 본토의 호족들과 반란을 일으킨다. 상황이 아주 위험하게 되었을 때, 사천분지의 요지인 건위, 광한과 촉군이 모두 반란에 가담한다. 유장은 결국 동주병의 보호를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같은 시기에 장강하류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손책이 죽은 후, 강동육군중 삼군이 반란을 일으킨다. 손권은 외래세력인 회사집단(淮泗集團)에 의존하여 가까스로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더욱 우연하게도 그들이 사후에 취한 조치도 놀라울 정도로 같다: 본토세력과 타협한다.

유장의 통치후기에 이르렀을 때, 사천정계에는 아주 신기한 현상이 나타난다. 유언이 동주병의 보스에서 일약 본토파의 대변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동주병은 오히려 계모가 낳은 잡종취급을 당했고, 유장이 방비하는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나중에 유장이 유비를 사천으로 부르는 것에 반대했던 주부(主簿) 황권(黃權)은 파서인(巴西人)이다; 자신이 성문에 매달려 죽기를 각오하고 유장에 간언했던 왕루(王累)는 광한사람이다; 유비가 성도로 남하할 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장임(張任)은 촉군사람이다. 유장에게 견벽청야의 전략으로 유비가 약탈할 것이 없도록 하자고 건의하고, 유장이 물러난 후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은 정도(鄭度)도 광한사람이다; 장송(張松)이라는 조정책임자도 성도사람인데, 그의 형인 장숙(張肅)은 대의멸친하여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의 뜻은 유장이 우리 사천현지사람의 이익을 대표하는데, 왜 유비를 끌어들여서 다시 한번 2등국민으로 전락하려는 것이냐는 것이다.

반대로 동주병의 골간(骨干)인 법정(法正), 맹달(孟達) 두 살마은 유비를 한번 살펴본 후 바로 유비의 편이 된다. 이엄(李嚴)은 더욱 심했다. 유장은 그를 보내어 유비를 막게 했는데, 유비와 만나자마자 바로 창을 거꾸로 들고 유비의 편이 되어버렸다. 가장 심한 사람은 동주병의 무장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사거물 방희(龐羲)이다. 유비와 유장이 싸우는 3년동안 그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유비에게 한중왕에 오르도록 진언하는 사람의 명단 속에서이다. 그리고, 서열도 제갈량보다 앞섰다. 이는 절대 패전자의 신분으로 유비집단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유장의 곤경

유장이 유비를 인랑입실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211년 조조가 관중군벌 마초(馬超), 양흥(梁興)등에게 손을 쓰기 직전에 있다.

이전에, 마초등은 조조의 부속세력이었고, 비교적 말을 잘 들었다. 조조가 아무런 이유없이 그들을 칠 리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중의 장로(張魯)를 친다는 명목으로 관중을 지나간다. 실제로는 이를 통해 마초등이 반기를 들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장은 그걸 잘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단지 조조가 한중을 치려고 하고, 한중은 파촉의 문호라는 것만 생각했다. 조조가 장로를 처리하고나면 다음 순서는 자신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장은 곧 쳐들어올 조조를 막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야 했다.

당시 그가 가진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동주파이고 하나는 본토파이다.

이 양파는 누가 세고 누가 약한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본토파가 동주파를 처치할 수 있었더라면 일찌감치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본토파를 보내면 아마도 막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동주파를 보내어 북방을 방어하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방희는 당시 계속 사천북부에서 장로를 막고 있어서,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두 가지 악영향이 미친다. 만일 방희가 조조를 막아내지 못하거나 혹은 성문을 열고 투항해버리면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유장은 끝장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방희가 조조를 막아내면 의심의 여지없이 큰 공을 세운 것이므로 동주병은 황제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장으로서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이자고 했을 때, 바로 그의 이런 약점을 찌른 것이다: "지금 사천의 여러 장수들 방희, 이이(李異)등은 모두 공을 내세워 교만하며 다른 뜻을 품고 있습니다. 예주(유비를 가리킴)를 얻지 못하면 적은 바깥을 공격하고, 백성은 안을 공격할테니 필패의 길입니다."

유장의 각도에서 보자면, 장송의 말이 맞았다. 현지인은 쓸만하지 못하고, 동주병은 감히 쓰지 못한다. 그러니, 유비를 불러들이는 것이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먼저, 유비는 조조와 악연이 있다. 이는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 그가 성문을 열고 조조에 투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유비는 사천에 기반이 없다. 큰 공을 세우더라도 스스로 유장을 내치고 자리를 차지하려할 리스크가 없을 것이다.

셋째, 유비는 수십년간 여러번 주공을 바꾸었다. 그러나 한번도 주공을 배신한 사례는 없다. 신용측면에서는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유장이 이렇게 한 것이 단순한 무뇌아의 행위라 할 수 있을까? 단지 그가 생각한 3가지 이유는 나중에 모두 문제로 되어버린다.

먼저, 조조는 아예 오지 않았다. 이는 유장의 전체계획의 기초가 흔들리는 일이다. 만일 조조가 북쪽에 버티고 있으면, 유비가 아무리 담량이 크다고 해도 유장에 등을 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조와 싸우는데 필요한 병마와 양초는 모조리 사천에서 공급한다. 그러면 유비가 무슨 일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조조가 오지 않게 되자, 유비는 사천에서 세력을 키울 여지가 생겼다. 은덕을 베풀며 민심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유비가 평생 쌓아온 신용을 유장을 속이는데 한번에 써먹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천본토파는 유장을 위해 최후의 피를 흘릴 의향이 있었다. 유비가 남하할 때, 촉인 정도는 그에게 견벽청야의 계책을 내놓는다. 백성들을 모조리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곡물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유비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서 치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장은 사천백성을 생각하여 그런 독계에 응하지 않는다.

유비가 남하한 후, 장임등 본토파는 다시 생명을 내놓고 3년간 저항한다. 나중에 병력이 성도에 이르렀을 때도 관리와 백성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 했다.

이 광경은 나중에 촉한이 멸망할 때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누가 더 사천의 민심을 얻었는지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장이 독하기만 했더라면, 유비를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천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게 했더라면, 나중에 한중지전의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를 보면, 유장은 사천인민들에게 면목을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부자가 20여년간 익주목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지 못했는데, 백성들이 3년이나 전쟁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것은 유장 자신 때문이다.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성문을 열고 투항하니, 여러 부하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결론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만일 나중에 후주 유선이 유장의 생각을 배웠더라면, 제갈량등 선대의 신하들이 죽은 후, 적시 "예주가 사천에 들어온 후, 형초(荊楚)사람들이 귀하게 되었다(豫州入川, 荊楚人貴)"는 국면을 바꾸어, 유장과 같이 본토화를 추진했더라면, 촉한은 아마도 등애(鄧艾)가 한번 기습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