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선집(毛澤東選集)>의 저작권문제

중은우시 2023. 3. 28. 22:18

글: 백매(白梅)

 

1995년 6월 중순,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는 중앙서기처와 공동으로 <모택동선집의 저작원고의 심의,고증에 관한 의견>을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모택동선집>의 1권 내지 4권의 160여편의 글 중에서, 모택동이 집필초안한 것은 단지 12편 뿐이며, 모택동의 수정을 거친 것이 모두 13편이고, 나머지 글들은 모조리 중공중앙의 다른 지도자, 혹은 중공중앙판공청 및 모택동의 비서등이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모택동선집>에 수록된 '저작'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이 서로 다른 시기에 각종 서신, 전보, 문건, 그리고 지도자의 강연원고를 모아서 완성된 것으로, 원래 '해방구'에서 소책자로 인쇄되어 돌려보던 것이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북해방구'의 하르빈과 같은 도시에서는 이들 소책자를 묶어서 두꺼운 <모택동선집>으로 편찬했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중앙정부에 "중공중앙모택동선집출판위원회"를 설치하고, 1951년 10월 12일 제1권을 출판했고, 1952년 4월 10일 제2권을 출판했으며, 1953년 4월 10일 제3권을 출판하고, 1960년 10월 1일 제4권을 출판했다. 1951년 10월 12일 제1권을 출판할 때, 중공중앙모택동선집출판위원회는 '본서출판설명'을 붙였는데, 이렇게 썼다:

 

"이 선집은 모택동동지가 중국혁명의 각 시기의 중요한 저작을 포함한다. 몇년전 각 지방에서 일찌기 서로다른 여러 <모택동선집>이 출간되었는데, 모두 저자의 심의를 받지 않은 것이고, 체계도 아주 혼란스러우며, 문자에도 오탈자가 있었으며, 일부 중요한 저작은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의 이 선집은 중국공산당이 성립된 후, 거친 각 역사시기 및 저작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편집된 것이다. 이 선집은 최대한 각 지방에서 과거 발행했던 선집에서 포함되지 않은 중요저작을 수집했다. 선집의 각편저작은 모두 저자의 교열을 받은 것이며, 그중 어떤 곳은 저자가 일부 문자상의 수정을 가했고, 개별문장에 일부 내용을 보충 혹은 수정했다."

 

이 출판설명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전체 <모택동선집>의 원고완성에 모택동이 직접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집의 모든 문장은 당연히 모택동 본인이 자신의 저작이라고 인정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공은 공식적으로 <모택동선집>은 심의, 고증한 결과라고 선포했다. 다만, 44년이 지나서, 중공의 관련무서에서 심의, 고증을 거친 결과 <모택동선집>의 제1권 내지 제4권의 160여편의 저작중에서 모태동이 집필기초한 것은 단지 12편 뿐이고, 모택동이 수정을 가한 것은 13편이며, 나머지는 모두 중공의 다른 지도자, 중공중앙판공청 내지 모택동의 비서가 기초한 것이었다. 이는 위의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가 중공중앙서기처와 공동으로 제출한 서면보고서인 <모택동선집의 저작원고의 심의,고증에 관한 의견>에서 공개된 것이다. 심의, 고증, 증거조사를 거쳐, <모택동선집>의 일부 저작은 각각 다음 인물들이 기초했다: 구추백(瞿秋白), 주은래(周恩來), 임필시(任弼時), 왕가상(王稼祥), 장문천(張聞天), 사각재(謝覺哉), 동필무(董必武), 임백거(任伯渠), 유소기(劉少奇), 애사기(艾思奇), 진백달(陳伯達), 강생(康生), 호교목(胡喬木), 육정일(陸定一), 양헌진(楊獻珍), 등력군(鄧力群)등. 그리고 모택동의 비서, 중공중앙판공청의 관련팀의 구성원들도 있다. 이 보고서에서 공개한 <모택동선집>의 제1권 내지 제4권의 약간 저작에 대한 심의, 고증결과는 다음과 같다:

 

<당내착오사상을 시정하는데 관하여>. 이 글은 1929년 12월 홍군제4군 제9차당대표대회에서 결의된 부분이고, 주은래가 기초했다.

 

<성성지화(星星之火), 가이요원(可以燎原)>. <모택동선집>에서 이 글은 모택동이 1932년 1월 5일의 통신에 나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구추백이 쓴 지시문건이며, 모택동, 등대원(滕代遠), 주일군(周逸群)이 홍군에게 강연했다.

 

<본본주의(本本主義)를 반대한다>. 이 글은 1930년 5월, 유소기가 중공중앙을 위해 기초한 당내지도자간부에 대한 강연, 교육자료이다.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모택동선집>에서 이 글은 모택동이 1936년 2월 제2차국내혁명전쟁의 경험을 종합하여 쓴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당시의 중공중앙정치국이 제2차국내혁명전쟁의 경험을 종합하여 장문천과 주은래가 기초하고, 모택동이 홍군대학에서 강연한 원고이다.

 

<실천론>(1938년 5월), <모순론>(1937년 8월). <모택동선집>에서는 이 두 편의 글을 모두 모택동이 썼다고 적었고, 모택동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연한 원고라고 하였다. 실제로는 주은래, 임백거, 왕가상, 강생, 진백달등이 기초한 것이며, 모택동은 단지 수정작업만 했는데, 모택동이 쓴 것으로 되어 버렸다.

 

<천백만군중을 쟁취하고, 항일민적통일전선에 진입하기 위하여 투쟁하자>. 이 글은 모택동이 1937년 5월 7일 중공전국대표대회에서 한 보고서이다. 그러나, 이 글의 원고는 실제로 중공중앙서기처에서 기초하고, 장문천, 주은래가 수정한 것이다. 

 

<지구전을 논한다>(1938년 5월),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1938년 5월). 전자는 모택동이 1938년 5월 26일에서 6월 3일까지 연안항일전쟁연구회에서 강연한 원고인데, 실제로는 이 두편의 글을 모두 주은래, 장문천, 임백거, 강생등이 기초했고, 동필무도 수정에 참가하였으며, 당교의 중심교재로 선정된다.

 

<신계단을 논하다>. 모택동이 1938년 10월,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중공제6기 6중전회에서 한 공작보고서이다. 원고는 왕가상, 강생이 기초했다.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1939년 12월). 이 글은 중공중앙서기처에서 집단기초한 것이다. 그후 주은래, 유소기, 왕가상, 강생등이 수정했고, 당교의 중심교재로 선정된다.

 

<신민주주의론> 이것은 모택동이 1940년 1월 9일 섬감녕변구문화협회 제1차대표대회에서의 강연원고이다. 원고는 중공중앙이 강생, 진백달, 애사기등에 위탁하여 작성되었고, 중공중앙에서 집단토론을 거쳐 원고를 확정한다.

 

<제2차반공고조를 물리친 후의 시국>(1941년 3월 18일). <제2차반공고조를 물리친 것에 관한 총결>(1941년 5월 8일). <모택동선집>에서 이 두 편은 모두 모택동이 당내에 지시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중공중앙이 주은래에 위탁하여 기초되었고, 동필무도 일부 의견을 냈다.

 

<우리의 학습을 개조한다> 이 글은 모택동이 1942년 5월 19일 연안간부회의에서 한 보고서이다. 원고는 강생이 기초하고, 왕가상이 수정했다. 당시 중공중앙학습연구조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당의 작풍을 정돈한다> <당팔고(黨八股)를 반대한다>. 전자는 모택동의 1942년 2월 1일 중앙당교 개학식에서의 강연이고, 후자는 모택동의 1942년 2월 8일 연안간부회의에서의 강연이다. 이 두 편의 글을 모두 임풍(林楓)이 기초하고, 진운(陳雲), 이부춘(李富春)등이 수정작업에 참여했다.

 

<연합정부를 논한다>. 이 글은 모택동이 1945년 4월 20일 중공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 한 보고서이다. 원고는 강생, 애사기, 호교목등이 기초하고, 임필시, 장문천, 유소기등이 수정했다.

 

<인민민주독재를 논한다>(1949년 6월 30일). 이 글은 중공건당28주년을 기념하여 쓴 글이다. 원고는 중공중앙이 집단으로 기초하였는데, 주요집필진은 진백달, 애사기와 등력군이다.

 

<모택동선집>의 저작권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나왔다. 이상의 각편의 글들은 완성된 구체적인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다; 다만 모택동이 쓴 것은 아닌데, 마지막에 모두 모택동이 쓴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 점은 모택동 본인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책으로 만들 때 그가 직접 심의, 교열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지적재산권' 침해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그 시대에 모택동 본인이건 아니면 다른 집필자들이건 그들의 머리 속에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전통의 도덕관념에 따르면 문책자부(文責自負). 글에 대하여는 스스로 책임진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마땅히 이런 권리침해해위는 도덕적으로 규제된다. 아마도 그런 원인으로 인하여, 모택동저작의 서명(署名)문제에 관하여 중공내부에서도 계속하여 서로 다른 의견과 논쟁이 있어왔다. 일찌기 1945년 6월, 중공 제7기 1중전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개의 아주 불합리한 결의를 내린 바 있다:

 

1. 무릇 모택동 동지가 강연한 것, 모택동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심의한 문건은 편찬인쇄시 모택동 동지의 명의를 쓴다;

2. 무릇 과거에 이미 모택동 동지의 명의로 발표된 저작은, 일률적으로 고치거나 다른 작자의 이름을 추가하지 않는다.

 

1956년 11월 상순,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인 진백달, 강생은 일찌기 <모택동저작의 빛나는 사상을 견결히 보위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내에 어떤 자들이 모주석의 지위를 부정하고, 모주석사상이 전당의 지도이론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이를 위하여 1956년 11월중순에 개최된 중공 제8기 2중전회에서 다시 한번 결의를 통과시키게 된다:

 

1. 전당은 모택동주석을 위시한 당중앙의 권위를 보호해야 한다.

2. 모택동동지의 저작은 모택동사상의 집중표현이고, 모택동동지의 혁명공작경험의 결정이다.

 

1980년 9월, 습중훈(習仲勛), 담진림(譚震林), 서향전(徐向前)등 5명은 중공중앙에 <모택동선집>을 다시 새로 출판하자는 건의를 낼 때, "어떤 것이 다른 사람의 저작인지, 어떤 것이 중공중앙의 집단저작인지, 어떤 것이 중앙문건인지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고 말한다.

 

1982년 5월, 중공중앙당교의 12명 주임급 교원과 25명의 학생은 연명으로 중공중앙, 호요방(胡耀邦)에게 <모택동선집>중 약간의 저작은 다른 사람의 저작인 문제를 제기한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도 "<모택동선집>의 재판 혹은 새로 출판할 때, 적당히 경정, 천명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이선념(李先念), 왕진(王震), 송임궁(宋任窮)등은 비시(批示)를 내린다: "이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당내에는 계속하여 누군가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부정하는데, 문제는 지도자층에 있다." "당내 우경사조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왕진은 당시 중앙당교 교장인데, 당교당위회에서 욕설을 퍼붓는다; "누구든지 감히 모주석의 빛나는 일생을 부정하거나, 누구든지 감히 모주석의 저작에 반대하면, 면직시키고, 당적을 박탈하겠다. 누가 감해 내 앞에서 모주석을 부정하면, 내가 총으로 대답해주겠다."(1985년 3월 중공중앙당교 <간보>)

 

1992년초, 호교목이 위중할 때, 병문안하러 온 양상곤(楊尙昆), 교석(喬石), 온가보(溫家寶)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택동저작에 관하여, 당내에 계속하여 이견이 있다. 마땅히 전면적으로 심의하여 어느 것이 모택동이 직접 쓴 것이고, 어떤 것이 모택동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고, 어떤 것이 중공중앙의 다른 동지가 쓴 것이고, 어떤 것이 편집과정에서 견강부회적으로 들어간 것인지를 가려야 한다."

 

호교목은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 저작중의 3편의 명작(소위 <노삼편(老三篇)>)인 <백구은(白求恩)을 기념하여>, <우공이산(愚公移山)>과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爲人民服務)>, 심지어 모택동의 시사(詩詞)중 가장 대표적인 <심원춘설(沁園春雪)> 즉 "북국풍광(北國風光), 천리빙봉(千里氷封), 만리설표(萬里雪飄)...."는 모두 자신(호교목)이 직접 쓴 것이므로, 자신의 이름으로 회복시켜달라."

 

1993년 6월초,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는 중공중앙서기처와 공동으로 2부의 보고서를 낸다. 하나는 <모택동저작정리출판업부중 존재한 문제에 관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호교목과 기타 인사들의 모택동저작에 대한 의견에 관한 처리>이다. 전자에서는 이렇게 썼다; "5년간 모택동이 생전에 남긴 강연, 보고서, 회의결의, 논문, 전보원고, 사론, 말씀과 비시등을 포함한 470여편의 저작에 관한 업무, 방문, 조사, 열독, 확인을 거친 결과, 모두 250여편은 모택동이 직접 기초하거나 수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중 160여편의 보고서, 강연, 전문, 사론은 다른 중앙지도자동지, 중앙비서국(판공실)과 중앙공작인원이 기초하고 완성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단지 일부 보고서, 강연원고를 검토하고 '동의' '좋다' 혹은 '모택동'이라고 세 글자를 써넣었을 뿐이다." 1994년 1월 18일, 중공중앙서기처는 위의 보고서에 대하여 3가지 지시를 내린다:

 

1. 중공중앙은 일관되게 <모택동선집>의 이론, 사상은 중국공산당 집체혁명공작의 결정이고,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 <모택동선집>원고의 작자, 원고부서, 원고완성시간과 장소를 심의, 고증하는 업무는 필요하다.

3. 일부상황은 내부에서만 장악하는 것이 좋겠다. 혼란과 쟁의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공중앙문헌연구실, 중공중앙당사연구실, 중공중앙당교가 6월에 다시 서면보고서 <모택동선집의 저작원고의 심의,고증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고, 중공중앙서기처는 7월 21일 다시 3가지 지시를 내린다:

 

1. 원래의 결정을 유지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단 고치게 되는 큰 영향이 있을 것이다.

2. <모택동선집>중의 이론, 사상은 중국공산당집단혁명공작경험의 결정이다.

3. 심의,고증결과자료는 보관하여 참고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