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실사회백태(紀實社會百態)
환관(宦官)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이래, 권력과 연결되면서, 오랫동안 황제의 곁을 따르고, 환관은 의문의 여지없이 권력중추에 가장 접근한 무리가 된다.
한, 당, 명 삼대에 모두 환관의 권력전횡 현상이 있었고 적지 않은 유명한 대태감(大太監)이 나타났는데, 송나라에는 그런 태감이 거의 없다.
그러나, 기실 송나라초기에 대권을 장악했던 대태감이 있었다. 비록 이름이 아주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아주 심원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왕계은(王繼恩)이다.
그의 경력은 송나라가 이후 환관전횡을 벗어나는 것과도 큰 관련이 있다. 오늘 우리는 북송의 대태감 왕계은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왕계은은 "오조원로(五朝元老)"라 말할 수 있다. 일찌기 주세종(周世宗) 시영(柴榮)의 재위기간, 그는 이미 입궁하여 황제를 모셨다. 당시 태감은 양자를 거두는 전통이 있었는데, 양부는 양자를 끌어주고, 양자는 다시 양부에게 보답하였다.
왕계은은 장(張)씨성의 환관의 양자가 된다. 그때부터 이름을 장덕균(張德均)으로 한다. 시영이 죽은 후, 왕계은은 다시 유제(幼帝) 시종훈(柴宗訓)을 모신다. 그러나 시종훈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교병변(陳橋兵變)"이 일어나고,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던 조광윤(趙匡胤)이 '황포가신(黃袍加身)'하여 돌연 개봉으로 돌아와 정권을 탈취하고 새로운 황제에 올라 송나라를 건립한다.
왕계은이 이 시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역사서에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조광윤의 탈권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시종훈을 모시는 태감으로서 조광윤의 편에 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래 하급태감이었던 왕계은이 조광윤의 집권시기에 이르러 돌연 감군(監軍)을 맡아,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여러 할거정권을 소멸시키는 전쟁에 참가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왕계은은 원래 권력이 비교적 컸고, 그리하여 송나라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그러나, 조광윤이 자신과 함께 거병한 '형제'들을 아주 경계하고, '배주석병권'을 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왕계은이 만일 후주(後周)시기부터 대권을 쥐고 있었다면, 조광윤의 신임과 중용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이 더욱 큰 것은 역시 왕계은도 조광윤의 황포가신에 어느 정도 공로를 세웠고, 그리하여 "종룡지신(從龍之臣)"이 되어 승진가도를 달렸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시 송나라는 단지 중원지구만 장악하고 있었고, 북방과 남방에는 모두 할거정권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광윤은 왕박(王朴)이 <평변책(平邊策)>에서 제안한 "선남후북(先南後北)"의 전략에 따라, 먼저 남방의 각 할거정권을 공격했으며, 그중 실력이 가장 약한 형호(荊湖)부터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기간에 왕계은은 군대를 따르면서 계책을 내놓았고, 여러번 전공을 세운다. 오랫동안의 군대생활에 단련된 후, 그는 소수의 병력을 거느릴 재능을 가진 태감중 하나로 성장한다.
아마도 왕계은이 결국 정치투쟁에서 실패하였기 때문에, 사서에서는 그가 통일전쟁때 구체적으로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지 않고, 대체로 말살해버린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분명 적지 않았다. 최소한 조광윤이 중시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개보연간, 왕계은은 조광윤에게 그의 원래 성을 회복하기를 청했다. 어쨌든 그는 이전에 어쩔 수 없이 성을 장씨로 바꿔야 했으니까. 조광윤이 동의했고, 또한 그에게 "계은"이라는 이름도 하사한다. 그 의미즌 '은전을 계승한다'는 것이니 총애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후 그는 왕계은이라 불리게 된다.
그 시기에 황제로부터 이름을 하사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은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왕계은이 직접 황제인 조광윤에게 요청하고, 허가를 받아내고 이름까지 하사받은 것을 보면, 조광윤의 마음 속에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광윤은 웅재대략의 개국지군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공로도 없는 보통환관을 총애할리가 없다. 그러므로, 왕계은은 송나라의 통일전쟁에서 적지 않게 계책을 내거나 심지어 군대지휘에 참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송나라의 "선남후복"전략은 처음에 성공적이었다. 먼저 신속히 형호지구를 평정하고, 이어서 후촉(後蜀), 남한(南漢)을 없앴으며, 다시 연이어 남당(南唐)을 격패하고, 남당의 후주 이욱(李煜)의 투항을 받아낸다. 다만, 조광윤은 최종승리를 보지 못하고, 976년 신비스럽게 사망한다. 다만, 문제는 이전에 조광윤은 병이 심각한 증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날까지도 군대를 검열하고, 기운이 넘쳤으며, 모습에 어떤 이상한 점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동생 조광의(趙光義)를 불렀고, 그와 술을 마신 후에 신비스럽게 사망한다. 그리하여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전설을 남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조광의가 아마도 '부두(斧頭)"로 조광윤을 살해하거나, 술에 독을 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광윤은 자연사망이고, 단지 때마침 조광의가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조광윤의 사인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의문이 많다 .다만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상세히 논하지 않기로 한다.
조광윤이 어떻게 죽었든, 한 가지는 확인된다. 그것은 바로 대태감 왕계은이 그후에 핵심작용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비록 조광윤과 그의 황후가 모두 그를 더할 나위없이 신임했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위하여, 조광윤의 신임을 배신하고, 조광의와 한편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조광윤이 죽은 후, 황후는 왕계은으로 하여금 신속히 황자 조덕방(趙德芳)을 입궁시켜 조광윤의 후사를 처리하도록 한다. 이는 왕계은에 대한 고도의 신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보면 왕계은은 이때 궁중에서의 지위가 첫번째나 두번째에 해당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왕계은은 조덕방에게 가지 않고, 남부(南府)로 가서 조광의를 찾는다. 그리고 조광의에게 입궁하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는 조서를 위조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왕계은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조광의도 금방 반응하여, 신속히 입궁하고, 거짓이겠지만 한바탕 통곡하고나서 신속히 경성의 국면을 장악한다. 얼마 후에는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한다. 그가 바로 송태종이다.
이 프로세스는 물흐르듯이 이루어진다. 아무도 그가 미리 준비했다고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광의와 왕계은은 아마도 일찌감치 결탁했을 것이고, 왕계은에게 약간의 약속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왕계은이 관건적인 순간에 조광의를 향했고, 원래의 계승순서를 철저히 타파하게 만들고, 조광의가 북송황제에 오르도록 해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광윤과 조광의간에 '금궤지맹(金匱之盟)'이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 약정은 바로 조광의에게 황위를 전해준다는 것이다. 다만, '금궤지맹'의 진실성에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표시한다. 그리고 설사 '금궤지맹'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광의도 금궤지맹의 약정을 의문의 여지없이 깨버렸다.
왜냐하면, 금궤지맹에 따르면, 조광의의 황위는 자신의 아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되고, 그의 동생인 조정미(趙廷美)에게 넘겨주어야 하고, 최종적으로 다시 조광윤의 아들인 조덕소(趙德昭)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광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송황위는 조광의의 자손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조정미와 조덕소는 모두 신비스럽게 사망한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조광의로부터 계속 탄압을 받는데, 이는 실로 조광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중간에 왕계은이 중간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관건적인 계승문제에서 '종용(從龍)'의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중용된다. 조광윤이 죽은 후, 왕계은은 먼저 조광윤의 능침을 건립하는데 참여해서,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한다.
1년후에 다시 돌아와 내시행수(內侍行首), 즉 태감의 최고직위를 받는다. 이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대태감이다. 얼마 후, 왕계은은 하북자사(河北刺史)가 되어 군계고(軍械庫) 즉 무기고를 관장하여 권력이 더욱 커진다.
태감이 자사가 되고, 무기고를 맡는다니. 이를 보면 왕계은이 얼마나 중용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계은이 하북의 자사로 간 것은 또 다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송태종이 북벌을 준비하는 것이다.
978년, 오월(吳越)이 북송에 신복(臣服)한다. 송태종은 북한(北漢)을 토벌하고, 요(遼)나라의 수중에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회수하여, 조광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완성하여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북벌은 처음에 승리를 거두지만 나중에 실패한다. 먼저 북한을 지원하는 지원군을 격퇴시키고, 북한을 멸망시킨다. 그러나 그후 송군은 연경성 아래에 주둔하지만 오랫동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한다. 최종적으로 고량하(高梁河)전투에서 일패도지하고, 송태종도 부상을 입어, 나귀수레(驢車)를 타고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다만, 송태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986년, 그는 다시 한번 북벌을 시도한다. 역사에서 "옹희북벌(雍熙北伐)"이라 부른다. 이번에 송태종은 20만대군을 모아 3로로 나누어 연운십육주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왕계은은 명을 받고 역주(易州)에 주둔한다. 그리고 양초(糧草, 사람이 먹을 식량과 말이 먹을 건초)와 각종 물자의 공급을 총책임진다. 20만대군의 몰자보급을 그가 관리한 것이다. 이 직책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왕계은은 도덕수준은 부족한지 몰라도, 업무능력은 있었던 것같다. 그는 물자보급업무를 잘 처리하여 북벌활동을 잘 지원해준다.
다만 아쉽게도 전투현장에서 송태종의 지휘실수와 3로대군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등의 요소로 인하여, 송군은 요군을 이기지 못하고 3로대군이 모조리 패배하고 만다.
요군은 즉시 반격하였으며, 송군은 전선이 붕괴된다. 그렇게 제2차북벌도 실패로 끝난다. 이때부터 송나라는 점차 "수내허외(守內虛外)"의 정책으로 변화한다. 대외전략에서 날이갈수록 소극적이 되고, 공세에서 방어로 바뀌게 된다.

옹희북벌의 실패이후, 송나라는 다시 요나라군대의 남하위협에 직면한다. 이때 왕계은은 명을 받아, 역주단련사(易州團練使)를 맡는다. 나중에는 진정고양관삼로배진검할(鎭定高陽關三路排陣鈐轄)을 맡는다. 이는 실제로 송나라의 요나라와의 변경방어를 책임지는 자리이다.
왕승은은 패전후 요군의 반격을 방어하는 중임을 맡는다. 그리고 이 임무를 잘 완수하여, 요군의 남하를 막아낸다.
어떤 사람은 송나라때 농민의 난이 없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후기의 송강(宋江)의 난과 방랍(方臘)의 난을 놔두고서라도, 전기에 상당한 규모의 왕소파(王小波), 이순(李順)의 난이 있었다. 이것은 송태종의 통치시기에 발생한다.
북송이 후촉을 멸망시킨 후 사천사람들에 대하여 혹독한 착취를 함에 따라, 현지에서 반항의 바람이 일어난다. 993년에 이르러, 왕소파, 이순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청성현(靑城縣)을 점령한다. 가담인원은 신속히 수만명으로 늘어난다.
송군은 여러번 '소탕'을 시도하지만 연전연패한다. 994년초에 이르러, 이순은 심지어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스스로 촉왕(蜀王)을 칭하며, 백관을 설치하고, "대촉"정권을 건립한다. 촉국이 건립된 후 신속히 영토를 확장하여 송나라의 천협로(川峽路)의 대부분지역을 차지한다.
송태종은 그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한다. 이때 그의 곁에는 믿을만한 장수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왕계은을 검남양천초안사(劍南兩川招安使)로 임명하여, 송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반란군에 대한 전투를 지휘하게 한다.
왕계은은 명을 받은 후, 병력을 2로로 나누어 신속히 사천으로 진입한다. 1로는 수로로 가는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반란군의 후방을 습격한다. 1로는 검문관으로 촉지에 진입하여 정면으로 공격한다. 이순의 지휘실수로 적시에 검문관을 막지 못하여 왕계은은 신속히 이 험준한 관문을 넘어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후 왕계은은 반란군과 여러번 전투를 벌이는데, 연전연승을 거둔다. 결국 반란군은 성도에 포위되고, 1달이 되지 않아 성도가 함락되고 이순은 전사한다. 이때는 반란군이 성도를 점령한 시점으로부터 4달도 되지 않았을 때이다. 995년에 이르러, 반란군의 잔여부대는 왕계은에게 소탕당하고, 왕소파, 이순의 난은 이렇게 평정된다.

왕계은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다만 이런 큰 공을 세웠지만, 그는 송태종의 탄압을 받게 된다.
당시 송태종은 신하들을 모아서 왕계은에게 어떤 상을 내릴 지를 논의했다. 중서성에서는 왕계은으로 하여금 선위사(宣慰使)를 맡게 하자고 했지만, 송태종은 선위사라는 직위는 너무 중요하고, '국정지본(國政之本)'이므로 환관에게 줄 수 없다고 하여 그에게 선정사(宣政使)의 직위를 내린다.
왕계은은 당초 송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웠고, 다시 이런 큰 공을 세웠는데, 다시 탄압하고 경계하다니, 송나라의 환관전횡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계은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하여, 다시 한번 후계다툼에 참여한다. 그는 지난번에 후계문제에 간여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송태종의 원래 후계자는 자연스럽게 그의 적장자인 조원좌(趙元佐)였다. 그러나 조원좌는 원래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화살도 잘 쏘아, 문무를 겸비했다고 할 수 있어, 적합한 후계자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원좌는 그의 넷째숙부, 즉 조광의의 동생인 조정미와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조광의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여러번 핑계를 잡아 조정미를 탄압하고 박해했다. 조원좌는 조정미를 구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조정미는 울분에 빠져 사망한다. 그러자, 조원좌도 정신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하여, 구준(寇準)과 송태종은 상의를 거쳐, 셋째아들 조원간(趙元侃)을 황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송태종의 병이 위중할 때, 왕계은은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린다. 그는 이황후(李皇后)가 조원간을 좋아하지 않는 심리를 이용하여, 이황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창령(李昌齡),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이계훈(李繼勛), 지제고(知制誥) 호단(胡旦)등과 연합하여 다시 조원좌를 황태자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후에 일어난 일은 조금 괴이하다. 송태종이 붕어한 후, 재상 여단(呂端)은 왕계은을 서화각(書畵閣)에 가두어두고, 그후 이황후를 설득한다. 이렇게 하여 조원간이 순조롭게 등극하면서 이름을 조항(趙恒)으로 바꾼다. 그가 바로 송진종(宋眞宗)이다. 왕계은은 이번 투기에 실패하여, 계속 좌천되다가 결국 균주(均州)에서 사망한다.
이 기록은 확실히 기이하다. 왕계은의 일당은 세력이 아주 컸고, 그렇게 오랫동안 모의했는데, 어찌 왕계은이 서화각에 갇힌 순간 와해된단 말인가? 이황후는 원래 조원간을 좋아하지 않아서 조원좌의 황태자 지위를 회복시키려 했는데, 어찌 말 한마디에 쉽게 설득당한단 말인가?
이 중간에는 분명 한 차례 정변이 있었을 것이다. 단지 사서의 춘추필법에서 말살된 흔적이 있다. 아마도 송태종이 일찌감치 왕계은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며 대응조치를 취해놓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왕계은의 세력을 소멸시켜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송나라때 환관전횡이 없었던 원인중 하나이다. 송나라의 군주는 환관에 대해 고도로 경계심을 가졌다. 문인들이 대권을 장악하게 하고, 환관을 절대적으로 억누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여사대부공천하(與士大夫共天下)"(사대부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라는 것이다. 환관이 권력을 전횡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에서 왕계은처럼 '오조원로'로 경력이 아주 많고, 공로가 큰 대태감마저도 이런 최후를 맞이했으니, 그 후의 환관들은 고분고분 사대부의 통치질서에 복종한다. 송휘종때 동관(童貫)이 출현할 때까지.
그러나, 재미있는 점이라면, 한, 당, 명의 세 왕조는 비록 환관전횡이 있었지만, 한때 휘황했고, 만국내조(萬國來朝)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송나라는 환관전횡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얻어맞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굴욕과 함께 했다. 이를 비교해보면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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