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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황후간통스캔들: 요(遼)나라를 멸망시키다.

by 중은우시 2025. 2. 18.

글: 청수공류(淸水空流)

이 스캔들사건은 지금까지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은 확실히 요나라의 멸망에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쨌든 황후가 외간남자와 간통했다는 것이니, 정사에 기록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1063년, 이 해는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청녕(淸寧)9년이고, 북송인종(北宋仁宗) 조정(趙禎)의 가우(嘉祐)8년이다.

이 해에 북송에서 발생한 최대의 정치사건은 송인종의 붕어이다. 송인종은 북송의 4번째 황제이며, 12살에 등극하여, 42년간 재위했고, 54세에 붕어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

이 해는 요나라에 있어서 동탕(動蕩)의 한 해였다. 요도종 야율홍기는 요나라의 여덟번째 황제인데, 이 해에 아주 심각한 종실내란이 발생한다. 그해 칠월,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아홉째아들이자, 요흥종(遼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의 동생이며, 야율홍기의 숙부인 진왕(秦王), 황태숙(皇太叔),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인 야율중원(耶律重元, 일명 耶律宗元)이 큰조카 요도종 야율홍기가 사냥을 위해 외출한 틈을 타서, 반군을 모아 황제의 행궁(行宮)을 공격한다. 의도는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야율중원이 음모를 꾸밀 때부터 이미 기밀이 누설되어 있었고, 결국 이번 정변은 실패로 끝날 운명이었다.

야율중원은 아주 재미있는 인물이다. 그는 황태자(皇太子)에서 황태제(皇太弟) 그리고 현재의 황태숙까지, 항상 황위계승순위에서 1순위였다. 그러나 영원히 황제의 자리와는 한걸음이 떨어져 있었고, 영원히 닿지 못할 거리였다. 야율중원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자살하게 된다.

당초, 요흥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 야율중원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요흥종은 야율중원을 극히 중용하면서, 한번은 요흥종이 야율중원과 술을 마실 때, 아마도 크게 취해서인지, 요흥종은 야율중원의 어깨를 치면서, "아홉째동생, 형이 죽고 나면 황위는 너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한다. 요흥종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술김에 한 말이겠지만, 야율중원은 그것을 말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그후 야율중원은 매일 요흥종이 황위를 자신에게 넘겨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요흥종은 황위를 자신의 아들인 야율홍기에게 넘겨준다.

요도종이 등극하자, 야율중원은 자신이 요흥종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아들 야율열로고(耶律涅魯古)도 황태자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는데, 결과적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부자 2명은 진국왕(陳國王) 진육(陳六), 지북원추밀사(知北院樞密使) 소호도(蕭胡睹)등과 연합하여 모반을 통해 요도종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요도종의 심복인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신속하게 병력을 규합하여, 야율중원의 반란을 평정하게 된다.

야율을신은 자(字)가 호도곤(胡睹衮)이며, 한명(漢名)이 영필(英弼)이다. 야율을신은 요흥종연간에 문관리(文官吏)에서 호위태보(護衛太保)로 승진하고, 야율홍기가 즉위한 후에는 총애를 받아 청녕5년 지북원추밀사사(知北院樞密使事)가 되며, 조왕(趙王)에 봉해진다. 야율중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남원추밀사(南院樞密使)가 되고 위왕(魏王)에 봉해진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일거에 요도종시기의 권신이 된다. 나중에 요도종은 야율을신에게 특별히 성지를 내려, 야율을신이 군대를 동원할 때, 긴급한 상황하에서는 황제에게 사전에 보고하여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요도종을 제외하면 요나라의 최고권력자이다.

다만, 야율을신이라는 인물은 충신양장이 아니라 대간신이다. 요나라는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 국력이 날로 쇠퇴한다. 그는 확실히 화국앙민(禍國殃民)의 간상(奸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요도종이 야율을신을 중용했지만, 다만 그를 극히 혐오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요도종의 황후 소관음(蕭觀音)과 황태자 야율준(耶律浚)이다. 그리고 황태자 야율준은 이미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야율을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야율준이 만일 등극하게 되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야율을신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는 요도종으로 하여금 황후와 황태자를 폐위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 소황후에 대한 스캔들이 탄생하게 된다. 봉건시대에 자이모귀(子以母貴), 모이자귀(母以子貴)했다. 아들은 어미가 귀하면 귀하게 되고, 어미는 아들이 귀하게 되면 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소관음을 제거하면, 야율준은 모친집안의 보호를 잃게 되므로 그후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될 것이다.

소관음은 개략 4살때 당시 황태손이던 야율홍기와 혼약을 맺는다. 두 사람은 죽마고우라 할 수 있다. 그 세월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면서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왔다 .야율홍기가 황제에 오른 후, 소관음은 청녕원년 십이월에 황후에 봉해지고, 존호는 의덕황후(懿德皇后)라 한다.

소관음은 시와 글을 잘 썼다. 그녀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천성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요도종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소관음은 여러번 요도종에게 사냥을 줄이고, 조정업무에 더욱 신경쓰라고 권했다. 그러다보니 요도종은 그녀에게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되고, 소관음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소황후는 이를 힘들어 했고, 그녀는 궁안에서 몇 수의 시사를 써서 자신의 감정을 풀곤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회심원(回心院)>이다.

고대의 시가는 낭송할 수 있을 뿐아니라, 노래로 부를 수도 있었다. 즉 가사로 삼아서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황후는 궁정에 조유일(趙惟一)이라는 악사(樂師)를 불러, 조유일로 하여금 곡을 붙이게 했다. 그리고 조유일은 사죽(絲竹)을 잘 다루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시사를 가곡으로 만들었다. 소관음은 비파를 잘 탔고, 조유일의 사죽을 연주했으며, 관과 현이 서로 잘 어울렸다.

소황후가 조유일과 빈번하게 접촉하다보니, 점점 궁안에서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돌게 된다. 황후와 악사가 부정당한 남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야율을신이 고의로 퍼트린 유언비어이다. 그는 황후의 시녀인 단등(單登)과 협력하여 소문을 사방에 퍼트린다.

단등은 입궁하여 악사가 되기 전에는 원래 반란을 일으켰던 야율중원의 비녀(婢女)였다. 야율중원의 반란이 실패한 후 그녀는 액정(掖庭)에 들어갔고, 악기를 잘 다루어서 나중에 악사가 된다. 단등은 용모도 괜찮았고, 요도종은 단등을 후궁에 거두어 비빈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소황후가 동의하지 않는다. 소황후는 요도종에게 단등은 일찌기 반란을 일으킨 야율중원의 집안에서 비녀로 있었는데, 지금 그녀를 비로 삼게 되면 그녀가 마음 속에 원한을 품고 기회를 틈타 야율중원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말린다. 그렇게 되니 단등은 소황후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을신은 단등을 찾아가고, 두 사람은 뜻이 맞는다. 그리하여 즉시 소황후를 모함할 계획을 수립한다. 먼저, 야율을신은 <십향사(十香詞)>라는 시를 써서 그 시를 선등에게 건네준다. 단등은 기회를 틈 타 그 시를 다시 소황후에게 바친다. 이 <십향사>는 음모를 숨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자세히 분석해보면 기실 이 시에는 적지 않은 음담패설의 내용이 들어 있다. 나중에 야율을신은 소황후가 쓴 글을 얻어낸 다음 즉시 요도종에게 달려가 고발한다. 소황후가 악사 조유일과 간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후 야율을신은 미리 만들어둔 상소문을 끄집어 낸다. <주의덕황후사령관소(奏懿德皇后私伶官疏)>, 상소의 내용은 주로 소황후와 조유일간에 간통했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남자도 자신의 부인이 바람피우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황제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요도종은 즉시 소황후를 하옥시키고 혹형을 가한다. 황태자 야율준은 소황후의 네 명의 딸을 데리고 함께 땅에 꿇어앉아 요도종에게 모친에게 혹형을 가하지 말 것을 청하며, 자식들이 모친을 대신하여 형을 받겠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요도종으로부터 질책만 받는다. 심한 고문 끝에 소황후와 조유일은 억울하지만 죄를 인정한다. 요도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황후에게 즉시 자결할 것을 명한다. 소관음이 사망할 때, 나이 겨우 35살이었다.

소황후가 자결한 후에도 요도종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시켜 소황후의 옷을 모조리 벗긴 후, 허름한 돗자리로 둘둘 말아서 친정으로 보낸다. 젊은 황태자 야율준은 모친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자 야율을신에 대하여 이를 간다. 야율을신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장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다시 야율준을 모함한다. 요도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준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강등시킨다. 얼마 후, 야율준은 야율을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다. 모자는 이렇게 간상에게 죽임을 당한다. 야율을신은 나아가 황태손(皇太孫) 야율연희(耶律延禧)까지 죽이려 한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요도종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제로 야율을신의 권세가 너무 커졌다고 여겨서 야율을신을 파면시키고, 대강5년 왕의 작위도 박탈한다. 대강7년에는 야율을신을 하옥시킨다. 대강9년에는 송나라로 도망칠 음모를 꾸미고, 사적으로 병력과 갑옷을 숨겨두었다는 이유를 들어 교살형에 처한다. 1101년, 야율홍기는 붕어하고, 그의 손자 야율연희가 즉위한다. 그가 천조제(天祚帝), 즉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천조제가 즉위한 후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조모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소관음을 유골을 요도종의 침능에 매장한다. 만일 소관음이 저승에서 그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분명히 바라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소관음과 조유일의 비참한 최후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사이에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최소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아닐 것이다. 소관음은 말년에 요도종이 그녀에게 냉담하자, 감정을 의탁할 곳이 필요했다. 실제로 소관음은 정치투쟁에 휘말렸고, 그녀는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었다. 소관음의 비극은 이렇게 싹이 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