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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강청(江靑)의 묘비(墓碑)는 왜 괴이한가?

by 중은우시 2025. 4. 23.

글: 김감명(金鑒明)

북경의 서산(西山) 자락에 하나의 묘원(墓園)이 있는데, 복전공묘(福田公墓)라고 부른다. 모택동의 네번째 부인 강청의 묘시가 바로 이 묘원 안에 있다.

특별한 여인 강청(1914-1991)

강청을 특별한 여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녀에게는 도대체 어떤 특별한 점이 있을까?

첫째, 그녀는 신분이 특별하다. 그녀는 모택동의 네번째 부인이고, 모택동은 강청의 다섯번째 남편이다. 1938년, 연안에서 중공 고위간부들들의 환처(換妻) 붐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때 그녀는 24살이고, 모택동은 45살이었다. 1949년, 강청은 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둘째, 그녀의 "혼약(婚約)"이 특별했다. 강청은 상해에서 연안으로 가기 전에, 결혼이력이 혼란하고 복잡했다. 중공은 고위층부터 하층까지 모두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을 반대했다. 모택동은 이런 심한 말까지 내뱉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겠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서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강청에 대하여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요구했다: "하나, 모택동,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아직 존재하고 있고, 정식으로 해제되기까지 강청동지는 모택동 부인으로 자처할 수 없다. 둘, 강청동지는 모택동 동지의 생활기거와 건강을 돌보는 것을 책임져야 하며, 이후 누구도 당중앙에 유사한 요청을 할 수가 없다. 셋, 강청동지는 모택동의 개인생활과 사무만 관리하고, 20년동안 당내에서 여하한 직무를 맡는 것도 금지하며, 당내인사 및 정치생활에 대해 간여할 수도 없다."

셋째, 그녀의 혼인관이 특별하다. 1935년 8월 4일, 강청은 상해의 <민보(民報)>와의 인터뷰때 공공연히 선언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혼인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는 서로 애정이 비등점에 이르도록 성숙하면 되면, 결혼이라는 의식은 필요없이, 서로 동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건 그녀의 '연애신조'이다. 그는 말한대로 해냈다. 상해탄에서 조진모초(朝秦暮楚)하면서 황포강을 휘저었다. 그녀의 이런 혼인관이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당시는 80여년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넷째, 그녀의 별명이 특별하다. 1975년, <홍도여황(紅都女皇)>이라는 책이 홍콩에서 출간된다. "홍도"는 중국의 수도 북경을 가리키며, 중공정권을 얘기한다. "여황"은 강청이다. <홍도여황>은 공공연히 모택동이후, 강청이 홍도를 주재하며, 중국의 여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생활이 모든 것을 주도하던 시기에 이 책은 정계의 폭탄과도 같이 중공정국과 사회에 큰 진동을 가져왔다.

다섯째, 그녀의 예명(藝名)이 특별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평상시에 남색(藍色)의 의복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북평(北平, 당시 북경의 명칭)에서 왔다. 그리하여 스스로 "남평(藍平)"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상해아마추어극인협회와 계약할 때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남평(藍苹)"으로 개명할 것을 권했다. "남색의 사과(苹果)"라는 뜻이다. 그녀는 "남평(藍苹)"이라는 이름이 신기하고 눈길을 끈다고 여겨 그때부터 그 이름을 예명으로 삼는다.

여섯째, 그녀는 습벽이 특수하다. 그녀는 네 가지를 무서워했다: 바람을 무서워하고, 빛을 무서워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을 무서워하고, 소리를 무서워했다. 소리를 무서워한 것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강청은 업무인원들이 걸을 때 소리를 내지 말도록 요구했다. 그리하여 양은록(楊銀祿)등은 딱딱한 신발을 신을 수 없었고, 걸을 때 두 다리를 교차하고 두 팔을 들어서 마찰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고 기침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목이 가려워도 억지로 참아야 했고, 만일 기침소리를 내면 강청에게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일곱째, 그녀는 기호가 특별했다. 걸핏하면 사람의 이름을 바꿨다. 비서 양은록은 그녀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개명의 이유는 무슨 '봉건적인 냄새가 난다'든지, '자산계급의 돈냄새가 난다'든지 여러가지였다. 예를 들어, 양은록을 양영로(楊英路)로 바꾸었고, 경극배우 전호량(錢浩梁)은 호량(浩亮)으로 바꾸었으며, 피아니스트 은승종(殷承宗)은 성충(誠忠)으로 바꾸었고, 북경영화공장의 전문영화배우 이인당(李仁堂)은 이제(李齊)로 바꾸었으며, 영화배우 이수남(李樹楠)은 이광문(李廣文)으로 바꾸고, 배우 장련문(張連文)은 장문(張文)으로 바꾸었다....

여덟째, 그녀는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 특별했다. 강청은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때, "나는 모주석의 한 마리 개이다"라고 했다. 이 간단한 말에 숨은 의미는 아주 깊다. 강청은 문혁기간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모택동의 문혁노선과 지시를 개처럼 충성스럽게 집행했다. 모택동의 이미지와 권위를 보호하는데 개처럼 목숨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모택동을 위해 죄를 대신 지는 '개'가 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아홉째, 그녀는 죽은 방식이 특별했다. 강청은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했다. 1976년 강청은 체포된 후, 절망에 빠져 자살을 생각했다; 1984년 9월, 강청은 모택동기념관에 가보겠다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녀는 젓가락을 목구멍이 찔러넣었다; 1986년 5월, 강청은 양말 몇 개로 끈을 만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다; 1988년 12월 모택동 탄신95주년때 모택동은 가족모임을 요구했다가 허가를 받지 못하자, 50알의 수면제를 마셨다; 1991년 5월 14일 새벽, 당직간호사는 강청이 손수건 몇 장으로 끈을 만들어 욕조 위의 쇠받침대에 걸어서 자살한다.

열째, 그녀의 사망소식도 특별했다. 중국관방은 그녀의 죽음을 은폐했다. 1991년 6월 1일 미국의 타임지에 중공관영매체에 앞서 강청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식이 실린다. 그후 신화사는 6월 4일 북경에서 통신문을 내보낸다. 이 소식은 <인민일보> 제4면의 귀퉁이에 실린다.

열한째, 그녀의 묘비가 특별하다.

그녀에게는 이처럼 11가지나 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 그래서 그녀를 특별한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특별한 묘비

1991년 5월 14일 3시 30분, 간호사는 강청이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을 발견한다. 배우이면서 모택동의 처이면서 당과 국가의 지도자였던 그녀는 결국 '반혁명집단수괴'가 되어 목숨을 77세로 마감한다.

그날 오후, 모택동과 강청 사이의 유일한 딸인 이눌(李訥)은 310의원이 서명한 사망통지서를 받고, 여하한 형식의 장례도 치르지 않겠다고 동의한다. 5월 18일, 유해는 화장되었고, 이눌은 현장에 없었다. 강청의 친척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눌은 유골함을 집안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12년간 집안에 있었다.

강청의 비서 양은록의 회고에 따르면, 강청에게는 유언이 있었다. 죽은 후에 고향인 산동(山東) 제성(諸城)에 묻어달라고. 1996년 강청의 또 다른 비서인 염장귀(閻長貴)가 제성에 갔을 때, 시위서기가 그 건을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시위서기는 그에게 이눌에게 알려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봉황묘지(鳳凰墓地)를 마련해 두었으니, 강청의 유골을 받아줄 수 있다고, 분묘를 만들 수도 있고, 비석도 세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성에서는 성심성의를 다했고, 강청의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실현되는 것같았다. 그러나, 염장귀가 북경으로 돌아가서 제성의 뜻을 이눌에게 전하자, 이눌은 바로 거부한다.

중국의 전통관념에 따르면, "사자위대(死者爲大, 죽은 사람은 위대하다)"이다. 딸인 이눌이 모친의 유언을 지키지 않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컸을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저리 생각해본 후에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친을 미워하는 사람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어서, 고향에 돌아가 매장한다면 자신이 무덤을 지킬 수가 없다. 만일 누군가....그런 일이 발생하면 크나큰 불효가 아닌가.

중공16대이후의 어느 날, 한 '중앙지도자'가 이눌에게 얘기한다. 고향에 묻지 않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같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무도 돌볼 수가 없지 않느냐. 이눌은 그 기회에 북경에 묻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고, 상대방도 동의해주었다.

큰 짐을 내려놓은 것같았다. 이눌은 모친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찾기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리저리 비교해본 후 최종적으로 북경 서산 자락의 복전공묘를 택했다.

복전공묘는 북경역사상 비교적 일찌감치 조성된 공동묘지중 하나이다. 이곳에 매장된 사회명사들은 적지 않다: 청왕조 마지막 섭정왕 애신각라 재풍(載灃); 근대의 저명한 국학대사 왕국유(王國維); 저명한 문학이론가 전현동(錢玄同); 현대의 저명한 문학가 유평백(兪平伯); 저명한 경극예술가 학수신(郝壽臣), 여숙암(余叔巖), 양보삼(楊寶森), 조소루(趙筱樓)등 이원(梨園) 명류; 중공장갑차의 아버지 허광달(許光達) 대장; 현대핵물리학자 전삼강(錢三强)등.

동시에 복전공묘는 북경시 최초의 상등급 공동묘지이고, 석경산구급 문화재보호단위이다. 2022년 북경시 공동묘지중 랭킹3위이다(팔보산(八寶山)과 만안공묘(萬安公墓) 바로 다음이었다)

이상의 여러가지는 비교적 이눌의 '안전'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켜주었다. 그리하여 이눌은 복전공묘로 결정한다. 그래도 이눌에게는 걱정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묘비를 세우면서 몇 가지 신경을 쓰게 된다.

첫째, 묘지의 주인이름에 '강청'을 쓰지 않고, 강창의 본명인 이운학(李雲鶴)을 쓴다. 어쨌든 세상에 강청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운학을 아는 사람은 적을테니까.

둘째, 묘비의 정면에 비석을 세운 사람의 위치에 통상적인 관례를 깨고 단지 "딸(女兒)"과 "사위(女婿)"라고만 적는다.

그리하여, 강청의 특별한 묘비가 세워지게 된다.

이눌이 모친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12년을 기다렸고, 어렵사리 중공고위층의 동의를 받아 강청을 북경에 묻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후 그녀는 다시 묘지를 신중하게 골랐고, 마지막으로 비문에도 신경을 썼다. 기실 그녀의 우려는 이해가 된다.

1966년, 모택동이 일으킨 문혁으로 10년간 나라를 호겁을 겪는다. 강청은 문혁영도소조 부조장에 임명된다. 그리고 강청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모주석의 한 마리 개였다."

확실히 문혁을 돌아보면, 강청은 모택동의 종용과 지시하에 문혁을 위해 들고 일어났고, 문혁을 위해 목소리높여 부르짖었으며, 문혁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문혁 10년간, 비정상적 사망이 천만명에 이른다. 강청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80년 11월 20일, 최고법원 특별법정은 정식으로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안 주범"을 심리한다. 법정은 강청의 '주요죄행'을 선포하였는데, 주로 다음의 세 가지 방면이다:

하나, 그녀는 강생, 사부치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주석 유소기를 모함했고, 전국최대의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둘, 강청은 마음대로 많은 당정군지도자간부와 군중을 모함했다.

셋, 문화대혁명기간 강청은 임표와 결탁하여 대량의 반혁명활동을 했다.

문혁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공의 관용적인 졸을 버리고 장을 보호하는 방식이며, 토사구팽의 방식이라는 것을. 목적은 당수인 모택동의 죄책을 묻지 않기 위함이다.

이상의 기소에 대하여, 강청은 법정에서 이렇게 성명을 밝힌다: "너희는 국가의 이름을 빌어 무슨 특별법정이라는 것을 만들어 나에게 여러가지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이들 죄명은 하나도 성립될 수 없다. 내가 과거에 한 모든 것은 당중앙이 지시한 것이다." "현재 너희가 나를 체포하고, 나를 재판하는 것은 바로 모택동 주석을 더럽히는 짓이다."

강청의 이 말은 모택동과 자신이 문혁때 지시하고 지시받는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것은 문혁의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눌은 모친의 유골을 집안에 12년간이나 놓아두었다. 묻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친의 유언을 받들어 딸로서의 효도를 다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앞의 효도를 하다가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을 욕보이려는 복수자들 때문에 더욱 큰 불효를 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