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가양문산(作家楊文山)
펑웨이(馮瑋): "남경대학살은 오살(誤殺)이다"
푸단대학(復旦大學) 교수인 펑웨이의 이야기가 한간(매국노)논쟁의 서막을 연다. 그의 한차례 공개활동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남경대학살은 오살이다." 이를 통해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6주에 걸쳐 30만중국군민의 목숨을 빼앗은 폭행을 고의사건이 아닌 것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렸다.
역사기록은 이에 대해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남경에서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일본군장교 이즈마 시로(東史郞)의 일기에 상세히 살륙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국제안전구역 책임자임 욘 라베도 목격보고를 남겼다. 그외에 1946년 극동국제군사법정은 남경대학살을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주범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를 사형에 처한다.
펑웨이는 더 나아가 "항미원조(한국전쟁)은 중국이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 것이다"라고 말하여,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제7함대가 타이완해협에 진입하고, 10월에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한 배경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중국지원군이 그후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을 진행했는데, 그 목적은 전쟁이 중국영토로 번지지 않게 하여 동북의 공업기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펑웨이의 이런 주장은 신속히 인터넷에 퍼져갔고, 사람들의 역사진상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고, 후속 일련논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위양(于洋): "미국은 매년 조공을 받아야 한다."
칭화대학(淸華大學) 교차정보연구원 조리교수(助理敎授) 위양은 학술토론회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미국은 세계에 '글로벌공공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각국은 '정규채널'을 통하여 미국에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심지어 직접 "세공(歲貢)"이라는 봉건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까지 사용했다.
역사상, 미국은 확실히 1944년 브레튼우즈체계를 통하여 달러패권을 확립했고, 1948년 마샬계획도 서유럽재건을 도우면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냉전국면과 국가이익에 기반한 전략이다. '공공재'개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더더구나 전세계가 세금을 납부해야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후 국제질서에서, 유엔헌장은 각국의 주권평등을 명확히 하고, 여하한 형식의 '세공'요구도 현대국제법에 배치된다. 위양의 주장은 학술계에서 의문을 불러일으켰을 뿐아니라, 인터넷에서도 파란을 불러 왔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상의 조공체계와 나란히 얘기한 것은 황당무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후웨이(胡偉): "미중관계는 중국에 책임이 있다"
상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의 특별초빙교수가 한차례 학술활동에서 명확히 주장한 바 있다: 미중관계가 악화된 책임은 미국에 있지 않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시간라인은 2018년 3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트럼프정부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추가관세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고, 관련금액은 500억달러에 달한다. 이를 통해 미중무역전이 서막을 연다.
2019년 5월, 미국 상무부는 화웨이를 '실체명단"에 넣어, 미국기업이 화웨이에 기술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통해 기술봉쇄로 중국의 과학기술발전을 억제하려 했다. 2020년, 미국은 추가로 제재를 업그레이드시켰고, 중국기업의 대미투자도 제한한다. 그리고 남해, 타이완문제에서 속속 압력을 가한다.
중국은 이 과정에서 방어적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미국상품에 보복성관세를 추가징수하고, 반도체자주연구개발을 추진하고, 국제적으로 합작하고 대항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역사적 수치를 보면, 2018년에서 2022년 사이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일으킨 제재와 도발행동이 충돌의 주요맥락을 구성한다. 그리고 중국은 대부분 피동적으로 대응하며, 자신의 경제와 안전을 보호하고자 했다. 후웨이의 주장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시간순서와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펑웨이, 위양의 논쟁거리가 되는 주장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어, 신속히 인터넷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그는 여론이 주목하는 촛점인물이 된다.
량얜핑(梁艶萍): "야스쿠니신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호북대학(湖北大學) 교수 량얜핑은 SNS에 글을 올려서 이렇게 말한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신사참배이다." 그리고 그 성격을 "전사자를 존중하는" 행위라고 본다.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는 18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처음에는 일본내전에서의 사망자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했다. 다만 핵심전환점은 1978년 10월 17일에 발생한다. 당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등 14명의 2차대전 1급전범이 비밀리에 거기에 합사시킨다.
이들 전범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동경재판에서 판결을 받았고, 법정은 그들이 중국, 동남아등지에 대한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시행하여 수천만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인정했다. 전후에 일본지도자들은 여러차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예를 들어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참배하여, 중국과 한국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으며 외교관계가 한때 긴장되었다.
량얜핑의 말은 이런 행위를 간단한 추모로 보면서, 신사가 담고 있는 군국주의상징의미 및 다른 아시아국가의 역사상 상처에 대한 도발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글이 발표된 후, 신속히 인터넷에 전파되었다. 이전에 펑웨이가 남경대학살을 경시한 주장과 서로 호응하여 사람들의 역사진상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그녀의 이름이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된다.
스인홍(時殷洪): "북한을 징벌하여 미국에 잘보여야 한다!"
중국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박사지도교수인 스인홍은 학술토론회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중국은 북한을 징벌함으로써 미국에 잘 보여야 한다고 하여,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방향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건국한 이래, 중국과 장기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1950년의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때는 양국이 함께 싸워서, 특수한 역사적 유대를 쌓았다.
북한핵문제는 2006년 처음 핵실험을 한 때부터 촛점이 되었다. 특히 2017년 9월 3일, 북한이 제6차핵실험을 했을 때는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미국은 그후 유엔안보리에서 2375호결의를 통하여, 북한에 더욱 엄격한 경제제재를 가하여, 방직품수출과 석유수출까지 금지했다. 일본도 같은 해에 대북제재를 강화하여, 자산을 동결하고, 인원왕래를 제한했다.
중국은 이 기간동안 일관되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쌍방잠정중단"을 제안했다. 즉 북한은 핵활동을 잠정중단하고, 미국은 대규모군사훈련을 잠정중단하여, 반도의 안정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다. 스인홍의 건의는 이런 전략적 균형에 어긋나고, 미국일본의 입장에 완전히 경도되어 있다. 북한이 중국의 동북안전완충구역으로서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의 견해는 이전의 후웨이가 미중관계악화는 중국의 책임이라는 논조의 연장선이다. 그리하여 신속히 인터넷에서 비판을 불러왔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정학적 복잡성에 대한 고려가 결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스원잉(石文英): "아베가 암살당해서 아주 기쁘다"
당산사범학원(唐山師範學院) 교수인 스원잉의 말은 2022년 7월 8일 일본전수상 아베신조(安倍晋三)가 암살당한 후에 나왔다. 그녀는 SNS에 글을 실어 이렇게 말한다: "단체방에서 아무도 환호작약하지 않는 것이 아주 다행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아베신조의 정치생애는 1993년에 시작한다. 그는 전후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그리고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수상을 지냈고, 수상을 맡은 기간이 8년이 넘는다.
두번째 임기내에, 아베는 2015년 신안보법을 통과시켜 집단자위권을 해금하고, 미일군사동맹을 강화했다. 그리고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중일관계는 이 기간동안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분쟁과 역사문제로 계속 긴장되었다. 예를 들어, 2012년 중국이 댜오위다오의 영해기선을 선언한 후, 일본정부는 '국유화'했고, 쌍방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2022년 7월 8일, 아베는 나라의 길거리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이를 애도했고, 동시에 민간여론에서 일부 인사들은 아배의 역사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다. 스원잉의 글은 중점적으로 "아무도 환호작약하지 않는다"에 있어, 국내에서의 보편적인 정서와 대비되었다. 이전에 량얜핑이 야스쿠니신사참배의 의의를 가볍게 본 주장과 서로 호응되는 것이었다.
펑지하이(馮濟海): "918은 더 독하게 했으면 좋았다."
남경재경대학 신문학원 교수인 펑지하이의 말은 9월 18일의 "918"사변기념일 부근에 나왔다. 그는 SNS에 글을 올려, "당시 소일본이 왜 더 힘을 내서, 우리의 요(遼) 무슨 왜쇄철즙(猥瑣鐵汁)의 조상들을 모조리 도살하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비웃는 어투로 이 침통한 역사를 언급했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심양 유조호 부근의 철로를 폭파하여, "유조호사건(柳條湖事件)"을 일으켰다. 이를 핑계로 심양으로 진군하고, 짧은 4개월만에 동북삼성을 모조리 점령한다. 3000만 중국동포들은 일본군의 발굽아래 놓였다. 918사변은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침략의 시작이었다. 그후 1932년 일본군은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만들어 동북을 일본침략전쟁의 중요자원기지로 삼았다.
전후에는 1946년 극동국제군사법정에서 일본의 이 기간의 침략죄행이 인정되었고, 동북이 함락된 14년간, 수백만명은 박해받아 죽거나 유리걸식해야 했다. 펑지하이의 말은 완전히 이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민족의 고난을 그저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전의 스원잉이 아베암살사건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도 연결된다. 그의 글이 발표되자, 신속이 인터넷에 퍼졌고, 사람들은 역사의 존엄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많은 사람은 그의 행위가 '역사를 망각"한 것이라고 비난했고, 그는 논쟁의 중심에 오른다.
위구이위안(余桂圓): "낭아산오장사를 삭제하자"
국가중소학교교과서 편찬팀의 팀장 위구이위안은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중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교과서에서 '낭아산오장사'의 내용을 삭제하길 원한다" 이런 주장은 항전교육의 레드라인을 건드린 것이다. 1941년 9월 25일, 하북 역현 낭아산(狼牙山)에서 5명의 팔로군전사 - 마바오위(馬寶玉), 거쩐린(葛振林), 쏭쉐이(宋學義), 후더린(胡德林), 후푸차이(胡福才)는 명을 받아 부대를 엄호하여 군중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일본군과 하룻동안 격전을 벌이면서 적군 수십명을 사살한 후 총탄이 떨어져 결국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국한다. 그중 3명은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2명은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진다.
이 사건은 1945년 항전승리후 널리 보도되었다. 1958년에는 정식으로 중소학교 교과서에 들어가, 중국항전정신의 상징중 하나가 되었다. 중일관계는 1972년 국교정상화이래 여러 기복이 있었다. 다만 역사교육은 시종 중국이 민족기억을 보호하는 중요진지이다. 예를 들어, 1982년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수정사건은 양국의 긴장대치를 불러온 바 있다.
위구이위안의 말이 나온 후, 즉시 교육계와 일반인들 사이에 파란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은 낭아산오장사등을 삭제하는 것은 항전역사의 전승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신속히 퍼져갔고, 일련의 사건에서 또 하나의 촛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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