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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54

모안영(毛岸英)의 죽음과 팽덕회(彭德懷)의 관계 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 2023. 5. 25.
손유세(孫維世): 주은래(周恩來) 양녀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 2023. 4. 18.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팽덕회(彭德懷) 죽음의 배후 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 2023. 1. 31.
구소운(邱少雲): 조작된 영웅의 전형인가? 글: 백매(白梅) 1953년 8월 30일, 중공 지원군당위(志願軍黨委)는 구소운을 중공당원으로 추인했다. 중국인이라면 구소운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모두 이라는 글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교과서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영웅" 구소운이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을 가리킴)"때의 빛나는 사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식문헌에 따르면, 구소운은 사천 사람이고, 1949년 군대에 입대했다. 1951년 3월 한국으로 가서 전투에 참가한다. 1952년 10월 12일, 소속부대 500명이 유엔군진지앞에 매복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떄, 유엔군이 맹목적으로 발사한 한발의 소이탄이 구소운이 잠복한 부근에 떨어졌고, 신속히 그의 몸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매복을 들.. 2023. 1. 26.
신중국의 개국장수(開國將帥)중 '외국인' 글: 조대부(趙大夫) 개국장수는 1955년-1965년, 군대계급제를 실행한 후, 장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은 해방군고위장군의 통칭이다. 1955년에서 1965년사이에 수여받은 원수(元帥)는 10명, 대장(大將)은 10명, 상장(上將)은 57명, 중장(中將)은 177명, 그리고 소장(少將)은 1,360명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개국장수중에 여러 명의 "외국국적자"가 있다는 것이다. 1. 개국상장 섭비(葉飛) 섭비(1914.5.7 - 1999.4.18), 원래 이름은 Sixto Mercado Tiongco이다. 1914년 5월 7일 필리핀 루손섬 케손주 티아옹시의 중국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섭손위(葉蓀衛)는 1900년 단신으로 필리핀에 갔고, 모친 Francisca Mercado는.. 2022.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