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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55

주소주(周小舟)와 왕조국(王兆國) 글: 장효웅(張效雄) 관료사회의 승진과 좌천, 환해침부(宦海沉浮)는 어떤 때는 중대한 역사의 전환점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저 작은 일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부득이해서이다. 왜냐하면 '형세는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스스로 자초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주소주와 왕조국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점을 잘 설명해준다. 1959년 여산회의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의견서"를 써서 제출한다. 그러다가 '반당집단'의 수령으로 타도당한다. 그 전에, 팽덕회는 호남으로 가서 조사연구할 때, 당시 호남성위 제1서기이던 주소주가 배동했다. 여러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은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모택동은 '팽대장군'과 결렬한 후, 주소주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2020. 10. 10.
당납(唐納): 강청(江靑)의 전남편, 모택동을 만나다. 글: 문사춘추(文史春秋) ㅇ 1930년대 '남평(藍萍)'이라는 예명으로 상해탄 영화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강청은 일찌기 다재다능하며 다수선감(多愁善感)한 저명한 영화평론가 당납(그의 본명은 馬驥良이다)과 곡절많은 혼인생활을 겪었다. 이들의 이혼사건은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알았다. 그러나 당납이 강청과 이혼한 후에 어떤 인생을 보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후, 절망에 빠진 남평은 상해를 떠나 섬북(陝北)으로 간다. 연안에 들어갈 때, 남평은 이름을 강청으로 바꾼다. 그녀는 불안정했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심계가 뛰어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고,.. 2020. 9. 5.
상하이 제2대공안국장 양판(揚帆)은 왜 25년간 감금되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후, 상하이시공안국장은 5명이 연이어 모두 죄수가 된다: 제1대 공안국장 리스잉(李士英)은 7년간 감금되었고, 제2대 공안국장 양판은 25년간 감금되었고, 제3대 공안국장 쉬젠궈(許建國)은 7년간 감금되었고, 제4대 공안국장 황츠보(黃赤波)는 8년.. 2020. 3. 31.
"밀고자001호"의 최후 글: 유효(劉曉) 중국공산당이 1949년 정권을 차지한 후, 중국전통문화교육과 서방민주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에 대하여 가장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지식인에 대한 개조운동을 시작한다. 전종서(錢鍾書)의 처인 양강(楊絳)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세조(洗澡)"이다. 이 .. 2018. 6. 9.
소광염(蕭光琰): 비참한 최후를 맞은 "중국석유의 아버지" 글: 진봉(陳峰) 오늘날 우리는 석유를 에너지로 하는 배, 자동차, 비행기를 하면서 육해공로를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잊지 말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중국석유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광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에게 '감사'해야할 때, 그는 일찌감치 세상에 없었다. 그.. 2018. 3. 5.
1949년 5월 25일 미군이 칭다오(靑島)에서 철수한 내막은? 글: 문사원지(文史園地) 1945년 5월 25일 미군이 칭다오에서 철수한다. 청도에서 철수하기 전에, 미군은 어떻게 거취에 대한 이해득실을 평가했을까? 미국은 어떤 고려를 했을까? 미국은 무엇을 중시했을까? 최근 얻은 미국의 기밀해제문건은 우리로 하여금 그 역사의 진상을 알 수 있게 해.. 2017. 10. 29.
요문원(姚文元)의 실현되지 못한 출옥후 2가지 바램. 작자 미상 요문원은 1960,70년대에 아주 잘나간 글쟁이로, '무산계급이론가'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모택동은 "남요북척(南姚北戚)"(요문원 척본우)이라 불릴 정도이니, 그의 지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척본우(戚本禹)는 얼마후 타도되지만, 요문원은 여전히 잘나갔다. 1976년 10월 6일 밤에 .. 2016. 1. 1.
고강(高崗)의 권력은 어떻게 유소기와 주은래보다 커지게 되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모택동은 당의 과도시기총노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최소한 신세제풍파가 발생한 1953년초에는 모택동이 유소기와 주은래의 일부 언행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따라오는 고강은 비교적 좋아한다.. 2015. 5. 30.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 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대만 <연합보(聯合報)>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는 31명의 장개석의 신변에서 일했던 시종인원들을 인터뷰하여, 근 60만자에 이르는 구술역사를 완성했다. 대만당국의 '유엔퇴출'시 장개석이 분노하여 압설모를 집어던지고 화가나서 .. 2014. 10. 24.
마오안잉(毛岸英)의 진실한 모습은? 글: 왕목명(王沐明) 1. 마음대로 오고 가고, 일처리는 설렁설렁하다가 그만두곤 했다. 마오안잉은 1946년초에 귀국해서, 1950년 조선으로 가기까지 근 5년여의 시간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어떤 업무에 종사한 적이 없었던 것같다. 정식으로 공개된 업무경력은 모두 짧은 몇 달 혹은 몇십일.. 2014.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