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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고고

"곤륜석각(昆侖石刻)"의 진위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25. 7. 3.

글: 단단결(段丹潔) 중국사회과학보 기자

(2025년 7월 2일)

최근 들어,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 동도(仝濤)는 <청해 황하원(黃河源)에서 진시황이 사람을 보냈다는 "채약곤륜(採藥昆侖)"석각이 발견되다: 고대 '곤륜'의 위치를 실증하다>는 글에서, 처음으로 이 황하원석각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남긴 유일하게 원래의 장소에 남아 있던 각석(刻石)이며, 동시에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역사학,고고학, 고문자학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주목했고,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7월 1일, 동도는 본보의 인터뷰에 응해, 학계에서 주목하는 석각의 발견과정, 내용해석 및 자연지리환경의 특수성등의 문제에 대해 대답했다.

석각위치

석각의 발견: 우연중의 필연

기자: 이번 진시황이 보낸 사람의 "채약곤륜"석각의 발견과정을 소개해주십시오

동도: 이번 석각의 발견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청해성 과락(果洛)장족자치주 마다현(瑪多縣)인민정부가 우리를 초청하여 도굴이 심각한 토번(吐蕃)시기의 유적지 막격덕와(莫格德哇)를 현지조사를 하고 보보 및 발굴방안을 제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2023년 7월, 막격덕와 고성(古城)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 우리는 현지인원의 안내로 삼강원자연보호구(三江源自然保護區)내의 우두비(牛頭碑), 암각화, 불탑, 묘장(墓葬)등 다른 유적을 탐방했다. 찰릉호(扎陵湖) 북안의 산허리의 불룩 튀어나온 바위의 아래부분에서 우리는 이 석각을 발견했다. 석각의 표면은 풍화와 부식이 비교적 심각했으며, 여러 곳에 돌조각이 떨어져나간 곳이 있었다. 남은 글자의 흔적도 비교적 모호했으며, 개략적으로 "황제(皇帝)", "대(大, 나중에 고증을 거쳐 "채(採)"로 확인된다)", "낙(樂)"(나중에 고증을 거쳐 "약(藥)"으로 확인된다)등의 잔존문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 이 석각은 우리의 업무에서 중점사항도 아니고, 그것이 청나라때 석각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중시하지는 않았었다.

개략 2024년초, 우리가 막격덕와의 발굴방안을 정리할 때, 비로소 이 석각에 새겨진 "기묘(己卯)"라는 두 글자에 주목하게 된다. 나는 즉시 이건 명확한 연대가 있는 비각(碑刻)이고, 게다가 소전(小篆)의 자체(字體)를 감안해서, 나는 대담하거 더욱 이른 시기의 석각이라고 추측했다. 그후, 우리는 대량의 자료를 살펴보았고, 진나라때의 문자와 문헌과 대비해보고 점점 이 석각의 연대와 가치를 확정할 수 있었다.

기자: 당신은 어떻게 이 석각이 진나라때의 석각이라고 확정했나요? 논증과정에서 주요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동도: 이 석각을 진나라때 석각이라고 확정한 과정은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비교적 엄격했습니다. 먼저, 주요한 근거는 문자 자체입니다. 내용과 쓰는 법이 시대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이 석각에서 새긴 자체는 전형적인 진나라때의 소전입니다. 아주 강렬한 시대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후대에 모방한 것이 있지만, 구분은 아주 명확합니다. 다음으로, 석각중에 언급되어 있는 "오대부(五大夫)"라는 작위입니다. 이건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이후에 나온 것이고, 동한(東漢)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대부"라는 글자는 쓰는 법이 부합합니다. 상고시기에 글자를 만들고 쓰는 것에는 특별한 방식이 있는데, 진,한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석각의 연대를 확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그외에, 석각에 "곤륜(昆陯)"이라는 글자의 "륜(陯)"자는 관건적인 증거가 됩니다. "륜(陯)"자는 아주 모호하고,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어 완전하지 않고 극히 보기 드물어서 해독하는데 아주 곤란하였고,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륜"자의 부는 "부방(阜旁)"인데, 서한이후에 이렇게 쓰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없어진다. 나는 리야진간(里耶秦簡)의 발굴자인 장춘룡(張春龍) 선생이 기꺼이 제공해준 진간(秦簡)의 뚜렷한 사진과 대조해본 후 최종적으로 이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륜(陯)"자의 해독성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초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합리적으로 "곤륜", "방사(方士)", "채약(採藥)"등의 관련명문을 추측하고 판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전체 석각문본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석각의 역사적 의의: 곤륜의 지리위치를 탐색하는데 역사적 공백을 보완해준다.

기자: 알려진 바로는 당신보다 이전에, 청해사범대학 후광량(侯光良) 교수팀도 이 석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관련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동도: 솔직히 말해서 논문이 발표되기 전에, 나는 후광량 교수가 이미 이 석각을 발견했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다. 논문을 발표한 후, 동료가 알려주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후광량 교수는 2020년 7월 야외답사때 이미 이 석각을 발견했고, 그의 저서 <곤륜상하(昆侖上下)>에 이 석각에 대한 초보적인 내용을 발표하였다. 후광량 교수는 이 석각의 연대를 원(元)나라 혹은 청(淸)나라로 생각했고, 이 두 왕조때 황하의 원류를 탐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후 2021년 다른 현지의 학자들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시간적으로 보면, 의문의 여지없이 후광량 교수가 가장 먼저 알아본 공로가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문헌을 살펴보고 석각의 일부 핵심정보를 판별할 수 있었다. 인물, 사건, 연대, 지명등. 그리고 이것이 진시황시기의 석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연구성과를 적시에 발표하였으며, 사회의 주목과 관심을 끌어, 고원지대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는 진귀한 문화재를 하루빨리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랐고, 제대로된 가치를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당시 내가 연구를 전개한 원래 의도이다.

기자: 이 석각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관련역사연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동도: 이 발견은 여러 방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 먼저, 이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유일하게 원래의 장소에 보존되어 있던 석각이라는 것이다. 또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시황이 사람을 곤륜산으로 보내 장생불로약을 찾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석각의 발견은 선진(先秦)시기 "곤륜", "하원(河源, 황하의 원천)"의 위치인정문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곤륜산은 중국고대역사지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위치는 계속하여 학계를 괴롭힌 문제였다. 석각의 발견장소는 해발 4300미터의 찰릉호반이다. 찰릉호의 남쪽은 바로 파안객랍(巴顔喀拉)산맥이고, <산해경(山海經)>, <우공(禹貢)>등 선진의 문헌에 나오는 곤륜산의 최초기록인 "곤륜지구(昆侖之丘)...하수출언(河水出焉)"(곤륜의 언덕은 황하의 물이 나오는 곳이다). "하출곤륜(河出昆侖)"(황하는 곤륜에서 나온다)"등의 중요한 지표특징과 매우 부합한다. 또한 당나라때 유원정(劉元鼎) 및 청나라 강희제때 하원(河源)을 탐사확정할 때 곤륜산의 위치에 대한 추정도 확인해준다. 또한 곤륜산과 황하원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외에, 석각의 발견은 수,당시기의 "당번고도(唐蕃古道)"가 진시황시기에 이미 가장 핵심구간을 개통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일찌기 진나라때, 중원내지와 청장고원간의 교통이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아놓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국고대교통사, 문화교류사를 연구하는데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논란에 대답하다: 엄격한 태도로 증거체인을 완성하다.

기자: 일부 네티즌들은 각자역법(刻字曆法), 시령(時令)등 방면에서 반대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도: 인터넷의 논쟁에 대하여, 나는 시종 개방적이고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먼저, 석각의 연대와 진실성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문자학, 역사학등의 밤년에서 연구를 통해 논증을 진행했다.

석각연대에 관하여 초보적으로 "이십육년삼월(廿六年三月)로 해독했다. 이건 현재의 자료에 기반하여, 추정하고 살펴본 후에 내린 초보적인 결론이다. "이십(廿)"자의 중간 네모 안에 마치 세로로 직선이 있는 것같았다. 그래서 "삼십(卅)"으로도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선의 잔흔(殘痕)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방향으로 기울어져있고, 첫번째 횡선과 수직도 아니다. 게다가 이 글자는 왼쪽아래 사선으로 연결되는 두 글자가 있어 마치 "廿"자의 중간 사선의 잔흔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해서, 당시에는 "이십(廿)"으로 보았다. 두번째 글자는 아래로 호형(弧形)으로 구부러져 있는 횡필(橫筆)이고, 중심에 수직의 짧은 선이 있으며 말단에는 오른쪽으로 꺽이는 것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칠(七)"로 해독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간독문자에서 "칠(七)"자는 모두 이런 긴 호형의 양쪽끝이 아래로 구부러진 횡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역보(曆譜)에 따르면, "이십칠년삼월"에 "기묘"일은 보이지 않는다. 긜고 요상관(饒尙寬) 선생의 <춘추전국진한삭윤표(春秋戰國秦漢朔閏表)>에서 새로 만든 역보를 보면, "이십육년삼월기묘일"이 보인다. 그리하여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십육(廿六)"으로 읽었다. 다만 이 연호정보에 대한 논증은 다시 각석의 초고해상도 도상과 결합하여 추가적으로 확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석각의 내용이 반영하는 사건의 가능성분야이다. 요상관 선생이 새로 만든 역보를 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전욱력(顓頊曆)을 채택했고, 십월(十月)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다. 마땅히 역법을 확정한 후인 다음 해, 즉 기원전220년일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26년은 이 전의 역법을 사용했고, 그 해의 삼월은 이 해의 6번째 달이다. 3번째 달이 아니라.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보면, 채약사단(採藥使團)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도착할 수 있었다. 사단이 얼음이 얼어 있는 한겨울에 출발한 것은 한편으로, 아마도 진시황이 급히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청장고워느이 기후환경 및 고대교통교통의 제한으로 인하여 부득이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진나라때 황하상류에는 아직 충분한 교량, 배등의 강을 건널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황하원의 고해발지구에는 습지, 늪도 많고, 여름에는 쉽게 수레가 빠질 수 있다. 겨울에 얼음이 얼어있을 때만 수레와 사람, 말이 얼음을 밟고 통행할 수 있다. 황하상류의 교량계통이 건설된 것은 한나라때 이후이다. 수,당시기 당번고도가 개통된 후에 점차 완비된다. 그후에 비로소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도 수레를 타고 고원을 지나갈 수 있었다. 이것은 문헌에 비교적 많이 기록되어 있다.

기자: 학술연구에서의 논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나요

동도: 학술연구에서 논쟁이 존재하는 것은 학술발전과정에서 통상적인 현상입니다. 학술의 발전을 추진하는 중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역사연구는 복잡한 것이고, 다면적인 것입니다. 연구대상은 왕왕 기나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야 합니다. 자주 정보부족과 단편화를 겪게 됩니다. 연구자는 여러 각도에서 추측하고 논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연구대상에 대하여도 왕왕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 석각이 이처럼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여러 학계의 동료들과 네티즌들이 제기해준 여러가지 전문적인 견해에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더욱 전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논쟁과 개방된 토론을 통하여, 사회각계의 이 고원무인지구에 대한 관심도를 제고시켰습니다. 이는 이 진귀한 문화재를 연구하고 보호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기자: 향후 어떻게 추가적인 연구를 진행하실 예정인가요

동도: 향후의 연구바향은 주로 두 가지 방면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석각 소재구역에 대해 더욱 심도있는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하여, 진나라때의 활동면을 정리하고, 석각에서 깨져나간 잔편을 복원하고 찾아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이 석각의 내용이 더욱 완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동시에, 석각주변에서 관련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업무를 진행하기를 바랍니다. 현재 여러 곳의 관련유적과 유물이 보입니다. 암각화, 석관장(石棺葬)등에 대해 추가로 연구를 해서, 당시 이 구역의 인류활동을 복원하여, 석각연구에 더욱 많은 배경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러 학과와의 협력을 통해 추가적으로 증거체인을 완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 고문자학, 고지질지리학, 암각화학등 여러 분야에서, 종합적인 교차연구를 진행하기를 바랍니다. 현대과학기술수단 예를 들어, 고해상도스캔, 마이크루부식분석, 석각마이크로흔적분석, 잔류물분석, 호수침전물분석등을 이용하여 더욱 정확한 연대, 가공기술, 고기후환경등 방면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외에 우리는 석각에 대한 보호공작을 강화하기를 희망합니다. 현재 석각이 소재한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여, 석각은 자연과 잉ㄴ위적인 파괴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지정부와 문화재부서가 협력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보호방안을 제정하여 이 진귀한 문화유산이 더욱 잘 보호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많은 고고발굴과 다학과연구를 전개함에 따라, 이 발견이 우리에게 더욱 많은 진나라때의 역사문화의 비밀을 알려주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