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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신강왕(新疆王) 성세재(盛世才)

by 중은우시 2006. 8. 11.

 

성세재(1897-1970)

 

"7.7"사변을 전후하여 많은 중국공산당원들과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신강으로 갔다. 거기에는 진담추, 모택민, 맹일명, 임로기, 등발 및 두중원, 모순, 조단 등의 사람이 있다. 이외에, 장정이 끝난 후, 홍군은 일찌기 2만여명으로 서로군을 조직하여 신강쪽으로 보낸 적이 있었는데, 거의 전군이 전멸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민족생사존망의 위기시기에 그들은 항일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신강으로 떠난 것일까? 이것은 모두 당시에 "신강왕"으로 불리우던 성세재와 관련이 있다.

 

성세재는 자가 진용(晋庸)으로 1897년 요녕성 개원의 한 글을 읽고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찌기 상해 중국공학과 일본 와세다대학 및 운남 강무당 소주분교, 동북강무당부설 교도대 등에서 공부했다. 졸업후에는 동북군에서 일했다. 나중에 장작림, 곽송령의 총애를 받아, 일본육군학교로 보내졌다. 1927년 남경정부가 성립될 때, 막 귀국한 성세재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상교(대령)참모를 지냈다. 1930년, 신강지방정부가 남경에 와서 군사인재를 모집하였을 때, 성세재는 이에 응한 후, 소련을 거쳐 신강으로 갔다. 그리고는 금방 독판공서에서 중장 참모장으로 승진했다. 1933년 4월 12일, 독판공서 참모처의 진중(陳中) 등의 사람이 정변을 일으켰고, 성세재를 내세워 국면을 장악했으며, 성세재로 하여금 신강지역의 최고통치자, 즉 임시독판(臨時督辦)이 되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신강역사에서 4.12정변이라고 부른다.

 

성세재는 권력을 잡은 후, 즉시 소련의 주적화(迪化, 현재의 우루무치) 총영사와 연락하였고, 신강에 소비에트정권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이후 그는 "4.12정변"의 지도자인 진중등을 살해하였다. 이어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홍군을 신장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군복으로 바꿔 입고, 장배원, 마중영 등을 물리쳐, 신강에서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스탈인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그는 소령총영사에게 연회를 배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서재를 구경시켜주면서, 서재에 있는 자본론, 공산당선언, 레닌주의문제등의 저작을 소개해주었다. 손님이 떠날 때에는 귀중한 선물도 건넸다. 이로 인하여 소련총영사는 모스크바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성세재는 공산주의를 믿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하여 연구도 깊다." 이 보고로 인하여, 스탈린은 성세재에게 대량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1935년 8월에만 한번에 500만금 루불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외에 스탈린은 신강에 정치, 군사, 재정등의 고문과 전문가 300여명을 파견했다. 여기에는 일찌기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하였던 중국공산당의 초기지도자 유수송(兪秀松)등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6년 4월, 성세재는 "반제, 친소, 민평(민족평등), 청렴, 평화, 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6대정책을 반포한다. 삽시간에 신강에는 붉은 기가 휘날리고, 곳곳에 스탈린과 성세재(그리고 모택동)의 거대한 그림이 걸렸다. 그래서 영하를 얻고, 감숙을 점거하며, 신강에 가까워짐으로써 소련으로 통하는 길을 뚫는 것이 중국홍군의 주요한 임무로 되었다. 서로군이 실패한 후, 성세재는 1개연대의 무장군인과 10대의 군용차량을 보내어 모스크바로부터 신강으로 오는 진운, 등대원등을 데리고 성성협으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서로군의 잔여부대원들은 이에 감동을 금치 못했다.

 

1937년 11월, 왕명과 강생은 소련에서 귀국하는 길에 신강을 지났다. 성세재는 그들에게 2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연안에서 더 많은 간부를 신강으로 보내어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왕명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일 성세재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면, 천리옥토가, 소련과 이웃한 신강지역이 총알하나 포탄하나 쓰지 않고 공산당의 천하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안이 중대하여 그는 즉석에서 대답하지는 못했다.

 

성세재가 왕명에게 입당요구를 한 후에, 중공중앙은 이를 매우 중시했다. 1938년 3월, 임필시가 모스크바에 가서 업무보고를 할 때, 신강을 지났는데, 성세재에게 "중공중앙 정치국은 성세재의 입당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일은 스탈린과 공산국제에 보고해야 한다"고 말햇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스탈린은 성세재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1938년 성세재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가 비밀리에 소련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성세재는 소련공산당원이 된 이후, 소련과 불평등조약인 "신소조차조약"(錫鑛協定)을 맺었다. 이 때, 소련측에서는 성세재에게 "너는 공산당원이다. 당연히 당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미국역사학자 앨런, 휘팅은 이 협정은 모스크바에게 신강에서의 광범위한 특권을 인정했고 이로 인하여 신강은 우루무치의 지배도 받지 않고, 중앙정부의 지배도 받지 않는 나라 안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평가하였다. 이외에 소련은 중국중앙정부의 동의없이. 1개의 기병연대와 공군부대를 파견하여 하미에 진주시켰다. 이 기병연대는 사실 비행기와 탱크를 보유한 기계화 여단이었고, 그들은 신강의 인후요새를 차지하고 있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성세재는 입당후, 소련의 정책을 받들어, "반대파 숙청"운동을 크게 벌였다. 신강에서 2천여명의 트로츠키파를 체포하였다. 유수송은 그의 매부였지만, 역시 트로츠키파의 문제로 소련으로 보내어져 처형당했다. 오래지 않아, 성세재는 다시 "왕정위계통음모폭동사건"을 만들어, 신강학원원장인 두중원을 체포했다. 이 사건에도 수천명이 연루되어 신강역사상 최대의 억울한 사건중의 하나가 되었다.

 

1942년초에, 성세재는 친소를 주장하는 동생이며 당시 기계화여단의 여단장이었던 성세기를 암살하고, 진담추, 모택민, 맹일명, 임로기, 유서병, 왕보건(신강일보사 사장)등의 공산당원을 체포한다. 그 후 그는 장개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여러차례의 음모폭동안은....모두 소련의 암중책동을 받았고....소련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제국주의침략의 길로 들어섰다"고 썼다. 1944년 성세재는 농림부 부장으로 임명받아 신강을 떠나고, 이로써 그의 11년간에 걸친 신강통치는 끝이 난다. 어떤 사람은 성세재의 변환은 국민정부의 압력과 소련독일전쟁의 폭발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상은 좀 더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智效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