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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심종문(沈從文)과 장조화(張兆和)

by 중은우시 2006. 5. 7.

 

 

소주지방에 장길우(張吉友)라는 부상(富商)이 있었다. 그는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채원배와 같은 교육계의 명사들과도 교류가 있어 교육사업에도 투자했다. 그리고 4명의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딸들로 이름을 떨쳤다. 나중에 이 집안의 둘째딸이 장윤화는 어언학자로 유명한 주유광에게 시집을 갔고, 셋째딸인 장조화는 유명한 작가 심종문에게 시집을 갔다.

 

장윤화와 주유광이 결혼의 인연을 맺은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의 동생인 장조화도 유명한 작가인 심종문의 오랜 동안의 애정공세에 투항하였다.

 

심종문은 풍경이 아름다운 상서(湘西, 호남서쪽)지방출신이다. 영롱하고 맑은 산수는 그의 재주를 키웠고, 감미로운 봉황소성은 그에게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을 심어줬다. 이 걸출한 소설가이자 역사문화재연구가는 일생동안 30여편의 단편소설집과 6부의 중장편소설을 썼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몇 안되는 현대작가의 한 명이다. 청년시대에 심종문은 신사조의 백화소설로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시인인 서지마의 소개로 중국공학교에 교장인 호적의 초빙을 받아 교사로 갔다.

 

당시 18세의 장조화는 중국공학에서 여자 1등을 할 정도로 총명하고 예뻤으며, 단순하고 자기마음대로였다. 장조화에게는 그녀를 따르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을 "청개구리1호" "청개구리2호" "청개구리3호"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마도 심종문은 "게으른하마13호"정도에 겨우 낄 수 있었을 거라고 장윤화는 말한다. 심종문은 장조화의 면전에서 말로는 못하고 그의 사랑을 글로 써서 장조화에게 보낸다.

 

선생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은 장조화는 그냥 침묵을 지킨다. 나중에 학교안에 심종문이 장조화의 마음을 얻지 못해 자살했다는 소문도 돈다. 장조화는 급한 마음에 심종문이 쓴 모든 편지를 가지고 호적 교장에게 간다. 장조화는 호적 교장에게 "선생님이 저에게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호적은 "그는 아주 완고하게 너를 사랑하는 구나"라고 말했다. 장조화는 "나는 아주 완고하게 그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호적은 "나도 안휘사람이다. 내가 너의 아버지에게 얘기해서 중매를 서줄까"라고 하였다. 장조화는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고 돌아왔다. 호적 교장도 그를 도와주지 않자, 그녀는 그저 심종문이 보내는 연서를 계속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종문은 마라톤식의 사랑편지를 계속 장조화에게 보냈다.

 

1932년 여름, 장조화가 대학을 졸업하고 소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심종문은 파금이 그에게 건의한 선물(서양문학집)을 사들고 장씨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둘째딸 장윤화가 나와서 초청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했다. 골목이 매우 좁았는데, 윤화는 태양아래 서 있는 심종문을 보고 "들어오세요. 태양이 셉니다"라고 하자. 심종문은 들어가지 않았다. 윤화는 "셋째는 도서관에 가서 집에 없습니다. 들어오세요"라고 했으나, 심종문은 다 듣고는 "가겠다"고 하고 고개를 돌려 돌아갔다. 심종문은 여관에 돌아와서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였다.

 

셋째가 돌아온 후 윤화는 조화에게 한마디 했다. "뭘 공부하는 척 하느냐. 오늘 그가 올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라고 했다. 조화는 용기를 내어 심종문을 집으로 오게 청했다. 심종문은 기쁜 마음으로 청도로 돌아가서 즉시 둘째 윤화에게 편지를 썼다. "만일 부친이 동의하시면 빨리 나에게 알려달라. 그래서 이 촌사람이 달콤한 술을 마실 수 있게 해달라".

 

장조화의 부친은 "자식들 혼사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도록 했다"고 전보를 보냈고, 장조화의 전보는 "심종문 촌사람 달콤한 술을 마시라"고 보냈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 최초의 구어체로 보낸 전보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정혼을 한 후, 장조화는 청도로 가서 청도대학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1933년 9월 9일 심종문과 장조화는 북경중앙공원에서 결혼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무런 의식은 하지 않았다. 집은 북경 서성구 달자영의 작은 집이었고, 이것은 중매인인 장윤화가 한 것이다.

 

불행한 것은 1960년대의 문혁은 심종문을 그냥두지 않았다. 계속되는 타격에 우울함이 지나쳐 심종문은 병적인 상태에까지 빠졌다. 그는 계속 "상서로 돌아갈래. 나 상서로 돌아갈래"를 중얼거렸따. 장조화는 이런 상황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장조화의 보살핌과 약물치료를 통해서 심종문은 건강을 차츰 회복했다. 심종문은 1988년 5월 10일에 세상을 떠난다.

 

장조화도 일찌기 소설 <<비가의 이소>>, <<소황의 비애>>, <<호반>>등의 소설을 썼고, 그녀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동시에 곤곡(昆曲)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뒤로 한걸음 항상 물러나 있었고, 자신은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일찌기 심종문은 "나는 여러 지방의 다리를 걸어보았고, 여러 구름을 보았고,여러 종류의 술을 마셔보았다. 그러나 단지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고 한 바 있다.

 

둘째 장윤화가 <<수>>라는 잡지에 쓴 글에 의하면 "1969년 겨울...70세의 심종문은 장조화가 그에게 쓴 첫번째 편지를 찾아서는 가슴속에 품고 따뜻하게 한 후, 다시 조심 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입안에서는 "이것이 셋째의 첫번째 편지야 첫번째..."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때는 이미 결혼한지 36년이 지난 후였다.

 

심종문이 죽은 후에 90년대의 <<종문가서>>가 출판되었다. 장조화는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종문과 나는 함께 살았는데, 일생이 도대체 행복하였는지, 불행하였는지.대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차츰 약간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의 사람됨을 이해한 것은, 그가 일생동안 중압감에 시달린 것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유고를 정리하기 시작한 현재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것을 지금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