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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원극정(袁克定, 원세개의 장남)의 말년생활

by 중은우시 2006. 4. 13.

1916년 6월 6일, 원세계는 전국에서 토벌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사망하였고, 황제꿈은 83일에 불과하였다. 그의 배후에서 황제에 오를 것을 극력 획책했던 맏아들 원극정은 이로써 부친을 속이고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죄명을 뒤집어썼다. 이후 원극정은 역사에서 종적이 사라져 버렸다.

 

원세개의 죽음은 방대한 원씨가족들에게 정치상의 쇠락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원극정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져서 만년에는 사촌동생인 장백구(張伯駒)에게 의탁하여 같이 생활한다. 장백구의 딸인 장전채(張傳彩)는 원극정에 대한 몇가지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남겼는데, 한때는 황태자를 노렸던 원극정에 대하여 남아있는 고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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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택원(承澤園)의 원극정

 

마르고, 작고, 장포를 걸치고 과피모자를 썼으며, 굽은 지팡이를 끌고 길을 걸어가면서 심하게 절룩거리며, 성격이 약간 이상한 노인네. 이것이 바로 원극정에 대하여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인상이다. 나중에 채악 장군이 원세개에 반대하는 내용을 묘사한 영화 <<지음>>에서 원극정은 아주 풍류를 즐기는 이미지로 나와 있는데, 사실은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제일 처음 원극정을 만난 것은 승택원의 집에서였다. 배분으로 따져서 나는 항상 그를 "대야(大爺, 큰아버지)"고 불렀다.

 

1941년 부친이 상해에서 납치되었고, 모친은 나에게 일이 생길까 두려워, 나로 하여금 손련중(유명한 항일장군, 나중에 하북성 주석이 됨)의 일가를 따라 서안으로 가도록 하였다. 모친은 부친을 구한 후에 일본이 침입함에 따라, 우리 일가는 서안에서 한동안 생활하였다. 내 개억으로 그 때 부친을 따라 같이 서안으로 도망친 사람중에 경극의 유명한 배우가 좀 있었다. 예를 들어 전보삼, 왕복산등이며, 그들은 원래 청나라 황궁에서 창극을 하던 후예였다. 항전승리후, 우리는 북경으로 돌아가 궁현후통 1호로 돌아갔다. 이것은 15무의 화원이 있는 집으로 원래는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환관 이연영이 살던 곳이다. 1946년, 부친은 수나라때의 대화가인 전자건이 그린 <<유춘도>>를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이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이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가 가장 아끼던 이 집을 팔았고, 모친의 일부 장신구를 팔아서 <<유춘도>>를 사들였다. 우리 일가는 이리하여 성내의 궁현후통에서 성밖의 승택원으로 이사가야만 하였다.

 

승택원은 옹정때부터 짓기 시작했고, 원명원의 부속원림중의 하나이다. 현재는 북경대학 서문에 마주한 곳을 울수원(蔚秀園)이라고 부르는데, 울수원이 바로 승택원이다. 부친이 승택원을 사기 전에는 이 곳의 주인은 경친왕이었다. 승택원은 매우 컸다. 크고 작은 30여간의 방이 있고, 안에는 가산과 인공호수가 있으며 아주 큰 하화지(연꽃이 핀 연못)가 있었다. 매우 운치있고 조용한 곳이었다. 부친은 성격이 담백하고, 친구들이 요청하면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이 친구는 대부분 그와 금기서화를 논하는 사람들이었고, 내 기억으로는 오소여, 화가 진중문등도 전부 우리 집에서 지낸 바 있다. 그 집은 현재 북경대학 과학사회연구중심 수학과연구소 겸 사무실로 쓰고 있다.

 

기억중에 승택원으로 이사온 후에 원극정은 우리와 같이 살았다. 우리 일가 세 식구에 일하는 아줌나는 승택원의 제일 뒤에 있는 집에서 살았고, 원극정의 방은 승택원 앞의 동편원이었다. 내가 집을 드나들 때, 모두 거기를 지나야 했다. 그 때 원극정은 이미 70여세였다. 그는 그의 부인과 둘이 생활했다. 그들은 각자 각자의 방에서 살았고, 원극정의 조카딸 노십칠(원세개의 17째아들인 원극우)의 딸이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원극정의 부인은 그의 원부인으로, 매우 뚱뚱했다. 마작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마르고 키가 작았던 원극정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으로는 그녀는 순무 오대의 딸이었는데, 원극정은 호랑이띠고, 그녀는 용띠라고 하였다. 옛날에 하던 말로는 용호상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씨집안과의 결혼은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일 것이다. 원극정은 나중에 두 명의 첩을 더 두었는데, 마지막에는 역시 정실부인과 생활하였다.

 

전면의 방에는 넓은 대문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원극정이 거기서 바람을 쐬거나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곤 했다. 해방군이 북경성에 들어왔을 때도 여기서 머문적이 있었다. 원극정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느낀 바로는 성격이 괴퍅했다. 아무 일이 없을 때면 서재에 들어가서 책을 보았다. 나는 그의 서재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선장서(線裝書, 줄로 묶은 책)였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기보(棋譜)를 보는 것이었다.

 

원극정은 부친보다 9살이 많았다. 부친은 그를 매우 존중해주었다. 시간이 있으면 전원으로 가서 그를 보살폈다. 부친은 친구가 매우 많았는데, 매번 집에서 시를 논하고 극을 보았다. 원극정은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다. 1948년, 부친이 연경대학의 중문과에 지도교수로 초빙되었고, 예술사과정을 맡았다. 이후 여러차례 북경, 천진의 각 대학교에서 시사희극 강좌를 열었고, 당시에는 영향이 컸다. 그 때 많은 연경대학 학생들도 주말에 승택원의 집안에 와서 부친을 예방하곤 하였다. 원극정에 대하여도 얼굴은 본 인연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홍학가인 주여창도 한 글에서 이를 언급한 적이 있다.

 

원씨가족

 

장씨와 원씨집안의 연원은 나의 조부때로부터 시작된다. 부친의 할아버지인 장진방(張鎭芳)은 원세개와 항성의 같은 고향이었다. 그리고 인척이었다. 장진방은 대대로 글을 읽는 집안이었고, 29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며, 북경에서 관직을 지냈고, 호부에서 육품 낭관을 지냈다. 그의 누나가 원세개의 동부이모(同父異母)인 큰형 원세창의 처였다. 그래서 원씨자녀들은 할아버지 장진방을 오구(五舅)라고 불렀다.

 

원세개가 직예총독을 역임한 후 대량의 인재를 모으고, 자기 사람을 배양할 때, 이재에 밝았던 장진방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원세개는 장진방을 호부에서 불러내어 염정(鹽政)을 맡겼다. 나중에는 장호염운사를 맡겨, 관직이 종삼품에 이르렀다. 장호염운사는 하북, 산동일대의 염정을 맡아서, 청나라 말기에 최대의 염관이었다. 염운사는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관직이었고, 당시 들리는 바로는 한개 지방의 염운사만 맡으면 1년에 들어오는 돈만 10만냥백은은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북방염정의 절반을 맡은 장호염운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장진방은 나중에 직예총독서리를 거쳐, 하남도독까지 지냈다. 원세개의 후원하에, 1915년 3월에는 이재에 밝은 것으로 유명한 장진방은 북방의 첫번째 상업은행인 염업은행을 창설하였으며, 당시 4대은행중의 하나였다.

 

원, 장의 양 집안은 친척간의 우의로 말하자면,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원세개는 자기의 큰형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그래서 원세개가 장진방을 발탁하고 염정의 중임을 맡긴 것은 장진방의 경제에 대한 재능을 알아봐서 그런 것이지 인척관계만을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장, 원 두 집안은 모두 현지의 대가족들이었다. 항성은 오래된 성이고, 주요한 성지역에 있는 거리 하나의 집은 거의 장씨집안 것이었다. 부친이 어려서 항성의 옛집에서 글을읽었는데, 7세가 되던 해 할아버지 장진방을 따라 천진으로 갔다. 그 고향의 집은 해방후에 모두 정부에 주었고, 부친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현재까지 장, 원씨의 친척들은 아직도 그 동네에서 살고 있다.

 

원세개는 일생동안 1처9첩을 두었고, 17명의 아들과 15명의 딸을 낳았다. 장남 원극정은 원세개의 정실부인인 우씨 소생이다. 우씨는 원세개의 하남 고향의 한 재산가의 딸이었다. 글은 몰랐고, 옛날 예절도 잘 몰랐으며, 원세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우씨는 원세개와의 사이에 원극정 하나만을 낳았을 뿐이다. 1913년 원극정은 말을 탈 때, 다리를 다치게 된다. 이후 평생을 불구로 살아간다. 부친은 어려서부터 원씨집안의 형제들과 어울려 지냈고, 매우 친숙했다. 성격상으로 보면 부친은 원극문과의 관계가 가장 좋은 편이었다.

 

원극문은 원세개의 둘째아들이다. 그의 생모는 김씨로 조선여자였다. 원세개는 청말에 조선에 상무대표를 역임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귀족출신의 김씨를 취하였다. 김씨를 따라 출가했던 두 아가씨도 같이 원세개의 첩이 되었다. 부친은 원극문과 취미가 맞았다. 시화, 경극을 좋아하였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부친(장백구), 원극문, 장학량과 부의의 동생인 부동을 합쳐서 "민국사대공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원극문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원세개가 총애하던 대이태(大姨太) 심씨에게 수양아들로 간다. 심씨는 자녀가 없었고, 원극문을 매우 좋아했다. 거의 말만하면 들어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원극문은 천성이 놀기 좋아했고, 방탕했으며,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우 총명했고, 한번에 열줄을 읽고, 한번 보면 잊지 않았따. 곤곡을 좋아했고, 고전(古錢)을 좋아했으며, 문인들과 노는 것을 즐겼다. 스스로 명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다.

 

원극정은 원세개에게 계속하여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는데, 원극문은 당시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명사의 풍모가 있던 원극문은 하나의 시를 지었는데 <<감우(感偶)>>라는 시이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절연고처다풍우(絶憐高處多風雨) 높은 곳에는 비바람이 많을 것이니

막도경루최상층(莫到瓊樓最上層) 경루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오르지 말지어라.

 

전하는 바로는 원세개는 일찌기 원극문을 가짜문사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 시는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원극문의 시가 전해진 후 많은 사람들이 원극문이 황제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극정은 이 시로서 원세개를 고발한 것이고, 최우의 두 구절은 명백하게 황제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얘기된다. 원세개는 화가나서 원극문을 북해에 연금하며, 그가 문사들과 내왕하는 것을 금지한다.

 

1916년,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이던 원세개는 중남해의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등극을 위해서 대전주비처를 만든다. 영국궁정내에서 유행하던 모양을 따서, 그의 십여아들은 각자 만든 황자복을 입었다. 황자복은 흑색으로 만들었고, 가슴에는 금선으로 각각 다른 문양을 자수해서 넣어 매우 아름다웠다. 예복을 입는 날 다른 몇몇 황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모두 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겼으나, 유일하게 원극문 한 사람만 입어보지 않았다.

 

이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그의 일생은 돈을 물처럼 썼고, 돈을 가지고 아껴본 적이 없다. 1918년 원극문은 상해에 가서 놀았는데, 들리는 바로는 한번에 60만냥을 썼다는 것이다. 원세개가 죽을 때 아들을 서세창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원극문이 돌아온 후에 대총통을 맡고 있던 서세창은 지팡이로 원극문의 다리를 때려서 부러뜨린 적이 있다. 아쉽게도 원극문은 1931년 천진에서 병으로 죽는다. 42세였다. 그는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 중 셋째아들인 원가류와 그 부인 오건웅은 나중에 세계에 이름을 날린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다.

 

최후의 황태자

 

승택원에서 처음으로 원극정을 만났을 때, 나는 이 사람이 바로 '소황제'를 하던 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학교에 갈 때 매번 나라를 훔친 큰 도둑 원세개라고 하던 때였고, 야심만만했던 원극정이라고 하던 때였다. 그런데 내가 본 원극정은 이미 칠순의 노인이었고, 그 때 내가 본 원극정은 단지 가련하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며, 괴벽을 가진 노인이었다. 영화나 역사, 문학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현대의 조비와 같이 심계가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승택원에서 생활하던 시절에 원극정은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손님들과 만날 때도 매우 젊잖고, 부드러웠다. 항상 약간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우리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그러했다. 그가 젊을 때 독일에 유학한 적이 있다고 하며, 그래서 독일어와 영어를 잘 했다. 보는 책도 독일책이 많았고, 어떤 때에는 일부 문장을 번역하기도 하였따. 아마도 젊을 때 원세개를 따라서 사방을 놀러다녔으므로 그의 말투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 하남말인지, 천진말인지 북경말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1916는 83일간 황제를 하던 원세개가 죽은 후 원씨 집안은 천진으로 이사갔다. 원세개가 총통을 지낼 때, 일찌기 북경과 천진의 두 곳에 가족들을 위하여 몇개의 부동산을 구입해두었었다. 원세개의 남겨진 부인과 첩들은 천진 하북 지위로에 거주했다. 원극정은 자기가 샀던 독일조계지역인 위이손로(현재의 천진 해방남로 85호)에 살았다. 1935년 다시 북경의 보초후통 63호의 집으로 옮겼다. 북경이 함락된 후, 원극정은 가족, 개인의사, 주방장등을 데리고, 이화원 배운각패루서쪽의 첫번째 집인 청화헌에서 살았다.

 

부친은 우리들에게 장씨와 원씨의 집안일을 잘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한번은 장백균이 부친에게 원극문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다. 부친은 그제서야 말해주었다. 항전시기에 원극정의 집안사정은 점점 몰락해갔고, 그는 원래 관계를 이용하여 장재석에게 몰수한 하남의 가산을 돌려달라고 했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원극정은 할 수 없이 재산을 전당잡혀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화북이 함락된 후, 처음으로 조여림이 원극전에게 하남 팽덕원상촌의 화원을 일본인에게 팔아라고 하였으나, 원극정은 극구 동의하지 않았다.

 

원세개가 죽은 후, 매 아들은 큰 재산을 나눠가졋다. 원극정은 장남으로서 재산분배를 주재하였고, 사람들은 계속 그가 유산을 균분한 것 말고도, 원세개가 프랑스은행에 예금한 것을 독식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돈은 금방 다 소비되었다.

 

부친의 기억에 의하면, 화북이 함락된 후, 일본의 정보원인 비원현이는 원극정을 매수하여 화북친일정권에 가담하게 하려고 하였다. 원극정은 몇 차례 부친과 이 일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그 때 그의 경제상황은 이미 매우 곤란했었고, 그는 여러차례 생각을 해보고는 직위를 맡으면 재물은 생길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매국노가 될 수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들리는 바로는 원극정은 신문에 성명을 실어, 자기는 병으로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그가 성명을 실은 그 신문을 표구하고 시를 지어 그의 절개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부친은 그 때 원세개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겼던 원극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가산이 탕진되고, 생활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을 보고는 1948년 그를 승택원으로 받아들였다. 나중에 중앙문사관관장을 맡은 장사도는 원극정에게 관원신분증을 주었고, 그에게 거기서 일자리를 갖도록 해주었다. 매월 5,60원의 수입이 있었다. 부친은 그가 매번 급여를 받으면 모친에게 주었다고 한다. 모친은 그의 돈을 받기를 거절했다. 이미 그를 집안에 받아들였으니 금전적인 문제로 서로 신경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1952년 연경대학이 북경대학에 합병되었다. 북경대학은 성내의 사탄에서 연원으로 이사왔다. 둘째해에 부친은 승택원을 북경대학에 팔았다. 우리집은 그 때 해정구에 30여무의 집이 있었는데, 승택원에서 이사나온 후에 그 집에서 반년을 살았다. 나중에는 부작의에게 매각하고, 다시 후해부근으로 이사갔다. 부친은 원극정에게 서성구에 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그가 이사들어가도록 해주었으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

 

우리가 승택원에 있을 때, 원극정의 가족들이 그를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원극정이 사망한 후,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친척들이 하남에서 올라와서, 그 집을 팔아버렸다. 모친은 나중에 말하기를 쓴 돈은 버린 물과 같다.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다. 원극정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아들이 원가융이고, 젊을 때는 미국유학을 하였고, 지질학을 배웠으며 귀국후에는 호북독군인 왕점원의 딸과 결혼했다. 해방후에는 원가융은 하북지질학원과 귀양공학원에서 교수를 했다. 1996년에 92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내가 공부할 때, 일찌기 원극정의 한 손녀인 원집정과 같은 학교였다. 그녀는 나중에 홍콩으로 갔고 몇년 전에 죽었다. 원씨집안은 이렇게 혁혁한 가문이었으나 나중에는 다 흩어지고 별볼 일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원극정의 이 집안후예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원세개에게는 대규모의 가족이 있다. 그의 1처9첩은 32명의 자식을 두었고, 제3대에 이르러 외손은 따지지 않더라도 17명의 아들이 22명의 손자와 25명의 손녀를 두었다. 원세개가 쓰러지자, 원씨집안은 사분오열되었고,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부친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바람이 원세개의 책을 쓰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