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범려(范蠡) : 제황철칙을 꿰뚫은 천하제일인

중은우시 2006. 7. 24. 00:09

범려. 자는 소백(少伯). 춘추말기 초(楚)나라 완(宛) 사람.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는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월(越)나라 대부인 문종(文種)이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그를 월왕 구천에게 추천했다. 구천은 그와 천하대사를 논의했고, 매우 마음이 맞았다. 그래서 그를 대부로 봉하였으며, 구천의 주요한 모사가 되었다.

 

당시의 월나라는 이웃한 오(吳)나라와 자주 전쟁이 발생하였고, 오왕인 부차의 부친인 합려는 바로 구천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부차는 부친의 원수를 잊지 않고, 군사를 정돈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월나라를 소멸시키고자 준비하였다. 기원전 494년, 월왕구천은 오나라가 아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틈을 타서 먼저 공격하였다. 범려의 권고를 듣지 않고, 전국에서 정예군사 3만명을 모아 북상하여 오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오나라의 부차도 모든 정예병사를 이끌고 월나라와 부초(夫椒)에서 전투를 벌였다. 월나라는 대패했고, 구천은 5천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들어가 방어하였는데, 다시 오나라의 군단에 포위되었다. 구천은 이 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범려에게 계책을 구했다. 범려는 그를 위하여 오나라의 군신에게 뇌물을 주고, 몸을 굽혀 오왕을 섬기며, 천천히 전기를 도모하라는 계책을 마련하였다. 구천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 책략을 시행하였다. 많은 돈과 미녀를 들여, 부차로 하여금 간신 백비(伯)의 말을 듣고, 월나라와 강화하고 병사를 되돌렸다.

 

월왕 구천은 부인, 아들과 범려 및 3백의 관리를 데리고 오나라로 갔으며, 동시에 대량의 보물과 미녀를 부차와 권신인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욕을 참고 3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부차를 감동시켰다. 부차는 오자서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구천을 돌려보냈다.

 

월나라로 돌아와서 구천은 와신상담하며, 국치를 잊지 않았고, 현명한 선비들을 모셨으며 노인들을 존경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휼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자식을 많이 낳도록 권고하고, 재물을 모았으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갑옷을 수리했다. 그리고 자주 마음을 비우호 범려, 문종에게 국사를 물어보았다. 당시에는 진심으로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문종은 전국의 정치를 곤리하고, 각종 업무를 질서있게 처리하였다. 범려는 군사업무를 주재하였으며,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범려와 문종은 구천과 공동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킬 장기계획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공손하게 부차를 모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차의 실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각종 방안을 세웠다.

 

부저추신(釜底抽薪)의 3가지 독계를 마련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제1계: 미인계

 

범려는 친히 민간에서 절색미녀 서시를 뽑았고, 정중하게 오왕에게 보냈다. 동시에 오왕으로 하여금 크게 토목공사를 하도록 하였고, 누각과 집을 건조하도록 하였으며, 주색잡기에 빠지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암중에 초나라와 친하고, 제나라와 결속하며, 진나라에 붙어서 최대한 오나라를 고립시켰다.

 

제2계 : 오나라 국고탕진책

 

그는 월나라가 재난을 당했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오나라에 10만석의 양식을 빌려달라고 한다. 다음해에 월나라가 대풍년이 들어 빌린 양식을 그대로 반환한다. 오왕은 월나라에서 반환한 쌀이 크고 좋은 것을 보고는 명을 내려 이 쌀을 종자로 삼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오나라 사람들이 씨를 심은 다음 해에 한 톨도 거두지를 못한다. 오나라 사람들은 월나라의 쌀과 오나라의 풍토가 맞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실제로는 문종의 독계였다. 10만석의 양식은 모두 물로 쪄서 보냈던 것이다.

 

제3계 : 오자서제거책

 

오나라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오자서를 제거했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충신이었고 기둥이었다. 그리고 문무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여러차례 오왕에게 구천을 조심하라고 권고했었다.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구천의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계책에서 큰 장애가 될 수 있었다. 마침 제나라와 노나라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오왕 부차는 병사를 보내어 제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월왕구천은 이 기회를 틈타서 파란을 일으키고, 극력 그 일이 되도록 도왔으며, 친히 관리를 이끌고 나가 축하해주고 대량의 예물도 바쳤다. 그리고 3천의 병사를 파견하여 오왕을 도와 출정하겠다고 까지 하였다. 오자서는 힘들게 간하였으나 오왕은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말이 많은 오자서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되었다. 태재 백비는 다시 유언비어를 퍼뜨려 오자서가 반란을 일으키려한다고 하였따. 부차는 사람을 보내어 보검을 내려 오자서로 하여금 자결하게 한다.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는 모든 정예병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중원패주의 지위를 다툰다. 나라에는 단지 태자 우와 노약자들만 남겨서 지키게 한다. 구천과 범려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구천은 범려를 대장으로 하여 병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친다. 범려는 병사를 이끌고 빠른 시일내에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姑蘇)를 점령한다. 부차는 황지(黃池)에서 이 나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를 널리 알릴 수가 없어 몰래 사신을 보내어 마치 이전에 월나라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초산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굴한 말고 두터운 예물로 구천에게 오나라를 사면해달라고 요청한다. 범려는 아직 한꺼번에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여 오나라의 화평제의를 수락한다.

 

기원전 478년, 월왕 구천은 다시 북진하여 오나라를 정벌한다. 두 나라의 군사가 싸워서 오나라 군사가 참패한다. 월나라 군사는 오나라의 수도 고소를 두텁게 포위한다. 범려의 전략에 따라, 높이 축대를 쌓고 포위만 하고 섬멸하지는 않았다.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기원전 473년, 오왕 부차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떨어져 싸우지 않고 스스로 패하였다. 마지막에 마포로 얼굴을 가리고, 지하에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고 하고는 검을 들어 자결하였다.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한 후,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회하를 건넜으며, 제나라 진나라등 제후를 만나 함께 주나라 천자에게 진공했다. 주왕은 그를 백(伯)에 봉하였다. 이후 월국은 장강과 회하의 사이를 차지하였고, 모든 제후들이 와서 진공하였으며 "패주"가 되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천은 범려를 상장군에 봉한다. 범려는 구천의 사람됨을 꿰뚫어보았다. 이제는 물러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느 깊은 밤에 범려는 금은보석과 가족과 부하를 데리고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로 떠났으며 장사를 통해 돈을 버는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바람을 같이 맞았던 동료 문종을 생각하여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권했다. "나르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창고에 들어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는 개는 팽당한다. 월왕의 사람됨은 목이 길고 새의 입을 가져 환난을 함께 할 수는 있으나 부귀를 함께할 수는 없다. 당신은 왜 떠나지 않는 것인가?" 문종은 이 서신을 본 후에 병을 핑계삼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문종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무고하였고, 구천은 검 한자루를 내리면서 문종에게 말하였다. "그 때 너는 나에게 7개의 계책을 주었는데, 나는 단지 3개만을 쓰고도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아직도 4개가 너에게 남아 있으니, 너는 지하에 가서 나의 선왕이 있는 곳에 가서 그 4개를 써보아라" 문종은 어쩔 수 없이 자살하였다.

 

범려는 구천의 "토사구팽(兎死狗烹), 조진궁장(鳥盡弓藏). 환난이공(患難易共), 부귀난동(富貴難同)"이라는 제황의 철칙을 너무나 잘 알았다.어려울 때는 모두 합심하고 서로 도와주지만 일단 천하를 얻고 나면, 바로 안면을 몰수하게 된다. 왜냐하면 천하를 빼앗은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까봐 두려운 것이다. 신변의 공신일수록 더욱 위험한 것이며, 일률적으로 모두 죽여버리게 된다. 고금의 얼마나 많은 영웅과 역대의 얼마나 많은 공신들이 공명을 얻은 후에 목이 날아갔는가? 누가 이 제황의 철칙을 제대로 꿰뚫어 보았는가? 범려는 실로 고금제일지(古今第一智)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뛰어난 점은 첫째, 인성에 대한 깊은 이해이고, 둘째는 사업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용감하게 물러설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 뒷부분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범려의 지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정치를 할 때는 약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고, 병사를 이끌면 백전백승이었다. 장사를 하면서도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특히 그의 관직, 권세, 재산에 대한 태도는 들기도 하고 놓기도 하는 것이었다. 시작도 좋게 하고 끝도 좋게 했다. 천하의 몇 사람이 도주공(陶朱公, 범려가 장사를 시작한 후에 개명한 이름)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제갈량은 삼국연의가 널리 퍼지면서 지혜의 화신처럼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범려의 고명함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범려는 공명을 얻고, 부귀를 얻는 것을 쉽게 해냈지만, 제갈량은 열심히 하였으나 결국 아무 것도 완성하지 못하고 죽지 않았는가. 후인들이 범려의 업적과 지혜에 대하여 선전을 적게해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