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堯)임금은 상고시대에 유명한 군주였고, 삼황오제의 한 명이다. 그는 자기와의 친분을 가리지 않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아주 재능이 뛰어난 순(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서, 군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이것이 유명한 "요순선양"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내용의 정확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전설을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문자로 표현하였으므로, 요순의 사이에 권력승계를 둘러싼 진상이 무엇인지는 논란이 있다.
거현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거현(擧賢)"설에 동조한다. 이것이 중화민족의 멸사봉공, 대의멸친의 전통적인 미덕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순(舜)의 성은 요(姚)로써, 부친은 맹인이었고, 모친은 일찌기 돌아가셨다. 나중에 그의 맹인부친은 다시 후처를 들였는데, 순의 계모는 속이 매우 좁았고, 악독했다. 나중에 계모가 자식을 낳았고, 이름을 상(象)이라고 하였다. 상은 먹는 것을 즐기고, 게을렀으며, 매우 발호하였다. 부모의 앞에서 자주 형인 순에 대하여 나쁘게 얘기했다. 순의 부친도 그들 편을 들었다. 계모와 상은 순을 처치함으로써 재산을 독차지 하고자 하였다. 순은 마음이 선량하여 그들이 괴롭혀도 개의치 않았고, 여전히 맹인부친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계모와 동생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이 때, 요임금은 이미 86세가 되었다. 그는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물을 뽑아서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 모두 순을 추천하였다. 요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후 순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래서 요는 자기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순을 각지로 보내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였다. 먼저 순을 역산아래에 있는 데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순이 오기 전까지는 그 곳의 농민은 토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자주 충돌이 있었는데, 순이 온 이후로는 농민들이 순에게 교화되어 서로 양보하고 도와주게 되었다. 그래서 생산량이 많이 늘었다. 순은 다시 하빈으로 가서 도자기를 굽게 되었다. 원래 그 곳의 도공들은 아주 엉망으로 일을 하여 열악한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순이 가고난 이후에 열심히 일하여 아주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순이 가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당시는 이미 사유재산제가 확립되어, 순은 자기의 재능을 활용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순의 맹인부친과 동생인 상은 순이 많은 재산을 모았다는 말을 듣고는 나쁜 마음을 품었다. 한번은 부친이 순에게 양식창고지붕이 이상하다고 올라가서 수리하라고 하고는, 순이 옥상에 올라간 후,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붙였다. 순이 불이 난 것을 알고 내려가려고 하자 이미 사다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행히 태양을 가리기 위하여 모자를 2개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들고 뛰어내리자 가볍게 땅에 내려앉고 상처를 입지 않았다. 순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그들은 이번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다시 함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순에게 우물을 파라고 하고는 순이 우물로 내려가자 우물을 메워버렸다. 순을 산채로 매장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총명한 순은 우물에서 옆으로 굴을 파서 빠져나왔다. 그는 여전히 부모와 동생에게 잘 대했다. 이리하여 가정은 화목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요는 순이 이렇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후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그래서 좋은 날을 택해서 요는 경성의 남쪽에서 선양의식을 거행했다. 이것이 역사상 "요순선양"이라는 것이다.
추대설
요임금이 나이가 들었을 때, 황권을 순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요의 아들인 단주(丹朱)는 부친의 대권을 승계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당시 순의 위망이 워낙 대단하여 요와 단주는 이를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가 죽자, 순은 단주와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단주를 피해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 때 천하의 제후들은 단주에게 가지 않고, 오히려 순에게로 와서 조견(朝見)했다. 만일, 소송이 발생하더라도 단주에게 가지를 않고, 순에게로 갔다. 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단주가 아니라 순을 찬양했다. 그래서, 여러 제후와 민중의 추대를 받아서, 순이 요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맹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순의 등극은 하늘이 내린 것과 백성의 추대로 인한 것이라고.
찬탈설
요순선양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선양이라는 것은 후대의 유가들이 신성화하고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순이 요로부터 대권을 찬탈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학자들은 그 근거로 몇 가지를 든다.
첫째는, <<사기>>의 기재이다. 이것을 보면 순이 행정관리권을 획득한 이후에 일련의 인사조치를 하는데, 예를 들면, 순은 요가 장기간 권력중심에서 배제했던 "팔개(八愷)" "팔원(八元)"을 등용하는데 역사상 "거십육상(擧十六相, 열여섯명의 상을 등용시키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순이 자기의 심복을 심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요가 가까이 했던 혼돈(混沌), 궁기(窮奇)등을 내보낸다. 이것은 역사상 "거사흉(去四凶, 네 명의 흉악한 인물을 제거하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자기에 반대하는 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인사조치를 거친 후에 요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버리고 비참한 운명이 개시되는 것이다.
둘째는, <<괄지서(括地書)>>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을 인용하여, "석요덕표, 위순소회야(昔堯德表, 爲舜所回也)", "순국요(舜國堯)...사불여부상견(使不與父相見)"이라고 적었는데, 개략적인 뜻은, 요가 먼저 순에게 연금을 당하고, 나중에 아들,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며, 이로써 핍박하여 그를 양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요의 아들 단주는 단수로 쫓겨나게 된다.
요순간의 권력승계에 대하여는 평화적 승계인지, 핍박에 의한 승계인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추측들이 존재한다. 당시에는 명확히 역사를 기재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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