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塵外瀟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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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홍루몽>>을 읽을 때, 나는 설보채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천박하다고 말할까봐, 지금까지 내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나중에 일부 고심막측한 홍학자들이 설보채를 비판하는 글을 보았다. 그녀는 밖으로는 뜨겁지만, 마음이 차가우면, 세상을 원만하고 매끄럽게 살아간다는 등등이다. 나는 그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설보채에 대하여 좋아하는 감정은 게속 늘어났다. 정말이다. 난 갈수록 설보채는 바로 "조화"라는 두 글자의 화신이라고 느꼈다. 봐라.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곳은 평화롭다. 집안에서 비록 인간이 덜된 오빠가 있지만, 그녀가 있어서 조치하고 처리하는 바람에 그녀의 모친은 인생에 희망을 지닐 수 있었다. 밖으로는, 그녀가 나이든 사람을 존경하고, 어린 사람을 아껴주며, 가난한 사람을 걱정하고 약자를 연민하며,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할 때,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며, 강하고 권세있는 자에게 아부하지도 않고, 약하고 어린 자를 능멸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가씨 집안에서 설보채를 위하여 생일잔치를 열어줄 때, 가보옥의 조모는 설보채에게 좋아하는 희극을 고르라고 하였다. 그녀는 가보옥의 조모가 나이들었으며, 요란스러운 희극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서유기>> <<노지심이 취해서 오대산에서 소란피우는 장면>>을 고른다. 가보옥의 조모는 매우 흡족해 한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 에피소드를 가지고 설보채가 가보옥의 조모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우리 자신이 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손님이라고 생각하자. 주인이 자기를 위하여 융숭한 생일잔치를 열어주는데, 어른들과 친척들이 있는 앞에서 약간이라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자기가 원하는대로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글을 읽고 예의를 아는 설보채임에야! 나는 이것이 바로 설보채가 노인을 공경한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본다.
약한 자를 아낀 것에 대하여는 가환이라는 시녀들조차도 무시하는 서출자식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녀는 충분히 존중해주고 전혀 권세나 이익을 쫓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연아가 도박문제로 가환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연아를 혼낸다: "설마 주인어른이 너한테 빈진 돈을 갚지 않겠느냐" 그리고, 형수연의 집안이 가난한 것을 알고도 그녀를 멀리하지 않고 반대로 암중으로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해준다. 임대옥이 그녀에 대하여 질투하고 냉소하며 풍자하는 것에 대하여도 그녀는 전혀 같이 싸우지 않고, 웃어넘겨버린다. 임대옥의 병이 심해졌을 때는 고소하다고 생각하거나 못살게 굴지 않고, 오히려 찾아가서 다정하게 이것저건 물어보고 약과 탕을 보내주었다. 결국은 그녀에게 감동한 임대옥이 예전처럼 그녀에게 각박한 말투를 쓰지 않게 되고, 마음 속으로부터 그녀를 '좋은 언니'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설보채는 가보옥에게 조상의 음덕으로 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공부하여 관료로 돈을 벌도록 권유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시험을 치고 공무원시험을 치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매 시대마다 매 사람이 원하는 가치의 방향은 다르다. 남자라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해야할 것이고, 집안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 가보욱에게 공부를 해서 돈을 벌으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시대의 남성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았다. 스스로 불량서적에 빠지지 않도록 자제하고, 그녀에게 적의를 가지고 대하던 임대옥이 <<서상기>>에 나오는 시가를 읖조리는 것을 들었을 때도, 임대옥을 공격하거나 그녀를 창피주려고 하지 않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임대옥에게 의미심장하게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도량과 흉금이 큰 것을 보여준다. 최근에 다시 <<홍루몽>>을 읽으면서 나는 설보채가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만일 내 아들이 큰다면, 그가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으로는 당연히 설보채와 같은 여자를 처로 맞이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여자만이 그에게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성공한 남자의 배후에는 모두 위대한 여인이 있다. 설보채는 바로 이러한 여인이다. 금훈이 우물에 자살한 건을 말하자면, 왕부인에게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부주의해서 우물에 빠졌나보다고 말을 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설보채는 바로 왕부인의 방조자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황금에도 100%순금이 없고, 사람에게도 완벽한 것이 없다. 십여세에 불과한 어린 여자아이에게 모든 것을 갖추도록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모든 일을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처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지 선량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자기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을 한번도 안하고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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