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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학"은 본질상 "위학(僞學)"인가"

by 중은우시 2006. 9. 29.

작자: 산동풍뢰(山東馮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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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가 책 두 권을 보내주었다. 책제목은 <<유심무의 홍루몽의 비밀풀이>>였다. 이 책의 겉표지에는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박아넣었다. "CCTV에 나오는 것은 나의 포기할 수 없는 공민권이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유심무의 이 책은 CCTV의 "백가강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 백가강단에서 유심무는 일찌기 그가 여러 해동안 홍루몽을 연구해온 성과를 시청자들에게 강연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홍학계의 어떤 사람이 그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하였고, 그래서, 유심무 선생은 겉표지에다가 위와 같은 문구를 집어넣어 인쇄하였다는 것을(아마도 출판사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저 CCTV의 덕을 좀 보자는 것이었을 것이고, 뭐 잘못된 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본인은 이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유심무 개인이면 되었지, 이 책에 대하여 CCTV와 연결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그렇게 한 것을 보니 짙은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절반을 봤을 때,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을 덮고 그냥 <<홍루몽>>원전을 꺼내서 읽었다.

 

내가 '더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한 것은 이 책에 무슨 흥분되는 게 없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팔아먹기 위해서 유심무는 아주 많은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유심무는 그의 연구성과를 책 속에 열거하였는데, 가보옥은 확실히 설보채와 성생활을 가졌고, 설보채는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적었다. 이름날리는 중국문단의 대작가가 뒤돌아서서 연구한 것이 기껏 가보옥이 설보채 또는 임대옥과 성관계를 가졌는지인지 아닌지라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유심무의 이 책을 더 읽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연구방법이 편집적이고 황당하기 때문이다. 많은 홍학가들과 마찬가지로, 유심무는 소위 연구에서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작가로서, 그는 홍루몽을 걸출한 소설책으로 읽지를 아니하고, 이 소설을 조설근의 족보라도 되는 듯이 연구한 것이다. 이런 방식이 작가라는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놀라울 뿐이다. 예를 들어, 금릉십이채중의 묘옥(妙玉)에 대하여 유심무는 그의 저술에서 여러편의 글을 썼는데, 제2부에서 3편의 60여페이지에 달하는 연구를 하였다. 제목은 제1페이지의 <<묘옥이 정책에 들어간 것과 순위의 수수께끼>>, 제72페이지의 <<옥석의 수수께끼>>에 이르러 끝이 난다. 그 중에서 묘옥이 왜 십이채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것 이외에, "묘옥의 사랑의 수수께끼"와 같은 것도 있다. 비구니의 이미지에 대하여 사랑까지도 연구해내다니, 정말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묘옥 말고, 유심우가 더욱 연구한 것은 진가경(秦可卿)이고, 그녀를 자기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진가경의 원형에서, 진가경이 고발당한 것까지 유심무의 고증과 조사는 재미가 있었다. 현재의 홍학연구가 고증과 억측의 구렁텅이에 빠졌는데, 홍루몽연구와 당대중국문화에 있어서,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만일 명청시기의 지식인들이 고증을 통하여 중화문화의 일맥을 전승하였다고 말한다면, 홍학가들의 번잡하고 무료한 고증작업은 도대체 당대문화와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일까? 후인들은 어떻게 오늘날의 소위 홍학연구를 평가할까? 전문적인 학술연구로 취급해줄 것인가? 아니면 옛사람들의 집단적인 억측병이 도진 것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인가? 홍학연구는 가짜학술의 경계선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소위 연구라는 것은 겨우 조상의 발자욱을 쫓아가는 것으로 밥을 얻어먹는 것인데, 의미가 어디에 있는 걸까? 문학작품에서의 인물은 원래 허구적인 것인데, 이런 인물에 비록 원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개조된 것이다. 이런 인물형상을 추적하여 알아내는 것이나 조설근이 생활했던 그 시대와 역사배경에서 하나하나 대조하여 찾아내고 있는데, 이것이 학술연구인가 포풍착영(바람과 그림자를 잡는 것)인가?

 

국내의 홍학연구는 무료한 추측이나 무의미한 고증이다. 문학창작과 발전의 각도에서 본다면, 묘옥이 도대체 누구와 사랑을 나누었던, 진가경이 왜 천향루에서 죽었던, 의미가 크지 않다. 독자에게 있어서 홍루몽 자체는 그저 뛰어난 소설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많은 정력을 들여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은, 홍루몽을 이용하여 '위대'하다는 허명을 얻게 하는 것과 문사들을 한무더기 먹여살리는 것 이외에는 역할도 거의 없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홍학연구 그 자체는 바로 일련의 학자들이 하는 일종의 '가짜학문'이다. 소위 홍학전문가는 바로 '홍루몽'을 먹고사는 문화노동자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회의를 열때 배경이나 이루고, 논문이나 읽는 외에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유심무는 작가로서 아주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왜 그가 홍학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연구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연구결과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잔치'에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한 작가로서 국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관심가질만한데, 그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얼마나 많은 소재들이 소설로 쓰일 수 있는데, 소설로 만들지 않고 버려두면서, 오히려 몸을 돌려 '홍학가'가 되고, '문화밥'밖에 먹을 줄모르는 백면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당대의 중국지식인들은 절대로 지식계의 그 다섯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문화계의 그 오일류의 귀족자제의 부용이 되어서도 안된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말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술을 마시며, 진짜도 가짜도 아닌 글을 쓰고, 이건지 저건지도 모르는 돈을 받고, 이렇게 한다면, "문화"라는 두 글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저 두 글자이다. 손님받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