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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 비판

by 중은우시 2006. 10. 24.

작자: 위사리선생(衛斯理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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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의 스토리구조는 아주 교묘하다" 이것은 홍학계에서 계속 즐겨쓰는 말이다. 홍학가의 입에서 말하는 소위 "스토리구조가 아주 교묘하다"는 것의 의미는 원저에 앞에서 뒤에 나오는 각종 인물의 운명과 이야기전개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복맥천리(伏脈千里, 복선이 천리나 깔려있다)"라는 등의 헛소리이다. 왜 이것을 헛소리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우선, 이런 헛소리의 기본전제가 매우 박약하기 때문이다. 스토리전개를 아주 교묘하게 하였다는 전제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토리전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홍루몽은 책 전부에 무슨 스토리전개랄 것이 있는가?  <<홍루몽>>에 있는 것은 전부 계모산피(鷄毛蒜皮, 닭털이나 마늘껍질같이 시시한 내용), 과담핍미(寡淡乏味, 맛이 없음)의 자잘한 일들 분이다.

 

<<정심심우농농>>을 보았는가? 안에는 할머나 하나가 고양이를 찾는 아주 무료한 이야기이다. 경요(瓊瑤, 대만의 유명한 드라마작가)는 이것을 가지고 여러편을 찍었다. 원래 아주 무료한 저능아적인 자잘한 이야기를, 경요가 떠들다보니, 무슨 살인사건이나 궁중정변처럼 깜짝 놀랄만하게 그린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전부 가짜이지 않은가? 모두 허장성세이지 않은가? 홍루몽의 이야기전개가 바로 경요의 소설과 같다. 전부 계소산피요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아무 관계없는 자잘한 일들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쓴 것일 뿐이다. 나는 홍루몽은 여자가 쓴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아니면 게이이던가. 왜냐하면 여자들이나 이런 무료하고 졸렬한 소설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현대문학에서 강조하는 갈등이나 플라이막스도 없고...

 

홍루몽안의 일부 유명한 스토리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소설이 얼마나 무료한지. 예를 들어 "주서가가 궁화를 보내는 장면", 예를 들어 "설보채가 나비를 잡는 장면", 예를 들어 "시사를 만들어 시를 짓는 장면", "사상운이 술에 취해 가슴을 드러내고 낮잠자는 장면"...등등. 이런 장면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는가? 도대체 무슨 스토리의 전개가 있는가? 도대체 무슨 예술성이 있는가? 나는 도저히 무슨 깊이를 알지 못하겠다. 물론 홍루몽팬들을 그렇지 않게 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주서가가 궁화를 보내는 장면에 대낮에 평아가 물을 쏟는 것을 보고는 그들은 이것은 왕희봉과 가련이 대낮에 음탕한 짓을 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조설근이 여기서 왕희봉과 가련의 황음한 생활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성이 높다고...이것은 말도안되는 얘기들을 지어내는 것이 바로 소위 '홍학'이다.

 

중국인을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고, 소설을 쓸 때도 마차가지다 모두 궤이하고 신비로운 전주를 두어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마치 한국 드라마 <<대장금>>의 제1집에서 사람같기도 하고 신선같기도 한 사람이 장금의 부친에게 "너의 일생의 운명은 세 여자와 관련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이런 장면은 아주 잘 설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많은 중국의 고전 장편소설에서 관용되던 기법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에는 매번 큰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일부 신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사람이 나와서 미래의 일을 알려주고 당사자에게 경고를 하곤 한다. 예를 들면 도사 좌사, 관차각등이 그들이다. 미리, 신선, 도사, 고승, 꿈 등을 통해서 나중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오래된 문학작품일수록 더 그렇다. 문학작품뿐아니라 일부 역사서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예술기법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홍루몽에 특유한 것도 전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들어 홍루몽이 독특하고 고심막측한 것처럼 얘기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홍학가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주사마적(蛛絲馬跡, 어던 사건이나 일이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하면 그들은 바로 원자자는 뒤에서의 이야기전개를 암시한다고 하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고악의 후40회에 대하여는 완전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조설근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왜 이런가? 바로 이런 홍학가들이 스스로 총명한 척해서 원저의 문자에 대하여 졸렬한 해석과 추측을 더했기 때문이다. 홍학가들이 하루종일 연구하는게 무엇인가? 그들은 바로 앞의 문자가 뒤의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연구한다. 그래서 유심무가 연구해낸 것은 진가격이 나중에 어떻게 된다는 것, 어떤 사람은 임대옥이 나중에 수용(水溶)에게 시집간다는 것, 어떤 사람은 설보채가 가우촌에게 시집간가는 것....등등의 말도안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가소로운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구성과를 얻어내는 것은 원저의 문자에 대한 추측과 상상에서 집어내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상용한자가 겨우 3000자밖에 되지 않아 많은 글자의 의미는 중복되고, 쉽게 다른 의미로 읽히거나 오해된다는 점이다. 바로 조상들이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문자를 발명하였으니, 오늘날의 홍학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자추측과 유희중에서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만다. 그래서 갈수록 더욱 원저의 문자에 미신적인 믿음을 갖는다. 그들은 조설근의 원저를 더욱 신격화하고, 그들은 '홍루몽의 이야기구조는 정말 교묘하다'는 감격적인 말을 내뱉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원저 또는 중국한자가 그들에게 많은 추측과 유희 마스터베이션을 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수렁으로 빠지게 되면서 그들은 더욱 전80회를 미신적으로 믿고, 이것이 바로 원작자인 조설근의 글이라고 보고, 더더욱 후40회의 글을 멸시한다. 왜냐하면 속작은 고악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하여 조설근을 칭송하고, 고악을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고악이 이 소설을 구해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조설근의 전80회는 정말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다. 80회동안, 거의 회계장부같다. 글재주도 아주 졸렬하다. 그러나 후40회에 오면 비로소 약간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비로소 유려한 문자가 나온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전체소설은 여전히 졸렬한 삼류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