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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홍학(紅學)은 20세기 최대의 학문스캔들인가?

by 중은우시 2006. 7. 12.

1979년 예일대학교수인 여영시(余英時)는 홍콩 <<중문대학학보>> 제2기에 발표한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혁명"이라는 논문에서 "홍학"을 "갑골학" 및 "돈황학"과 함께 20세기 중국의 "현학(顯學, 인기학문)"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홍학은 "호적의 제창에 따라 <<홍루몽>>의 고증업무는 이미 근대중국학술의 주류인 건륭가경시대의 고증학과 융합되었다. 이로 인하여, 학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홍학은 당대의 현학인 갑골학, 돈황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전혀 부끄럼이 없게 되었다"

 

중국예술연구원 중국문화연구소소장이면서 저명한 홍학가인 유몽계 선생은 2005년 6월에 출판한 <<홍루몽과 백년중국>>이라는 첵에서 중국의 현대학술은 홍루몽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적었다. 왕국유가 1904년에 발표한 <<홍루몽평론>>은 현대학술사상과 학술규범을 비교적 집중적으로 나타내고 있고, 현대중국사상문화무대에서 많은 일류급 인물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홍학에 발을 내딛였다. 예를 들어, 왕국유, 채원배, 호적, 노신, 진독수, 고힐강, 유평백, 오복, 진인각, 심종문, 곽말약, 왕력, 파금, 모순, 빙심, 장애령, 임어당등이 그들이다. 이외에 홍학은 학자들끼리 싸움을 가장 많이 벌인 영역이었다.

 

그러나, "홍학"이 인기있는 것은 단지 연구인원이 많고, 기간이 길며, 투입한 규모가 많다는 것이고, 논문과 글을 많이 썼다는 측면이지, 학술의 방법론상으로는 그다지 건륭가경때의 고증학을 제대로 승계하여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다. 의문을 풀고 해결하는 실적에서도 홍학은 학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여교수에 따르면, 색은파가 다시 나타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고증학이 이 몇가지의 기본문제에 대하여 전혀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홍루몽의 작가가 조설근인가 아닌가? 전80회와 후40회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지연재는 또 누구인가, 그(또는 그녀)와 원작자는 어떤 특수한 관계가 있는가?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도 고증파들은 여러가지 답안을 제시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정설이 나오지 못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설근의 생몰년대, 조설근이 조옹 혹은 조부, 누구의 아들인가의 문제등에 대하여 학술계는 아직도 서로 다른 의견을 고집하고 있다.

 

유몽계가 자신의 책에서 "지연재는 누구인가" "조설근이 누구의 아들인가" "속서의 작가는 누구인가"는 홍학의 3대 풀리지않는 매듭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연재가 어떤 사람인가? 조설근의 숙부래도 좋고, 백부래도 좋고, 조우래도 좋고, 당촌이래도 좋고, 조설근 자신이래도 좋고, 사상운이래도 좋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증거가 불충분한 추측에 불과하다. 연구자들간에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져있지 않을뿐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주장들마다 이를 뒷받침한 실증이 없다는 것이다...이미 알고 있는 자료에서 보면,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더라도, 지연재가 누구인지, 조설근이 누구의 아들인지, 속서의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세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세가지 풀리지 않는 매듭은 계속 내려갈 것이고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