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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

by 중은우시 2006. 7. 12.

구처기 :

1148년생. 산동성 사람. 호는 장춘자(長春子)임.

일찌기 전진교의 창시자인 왕중양을 스승으로 모심. 유명한 전진칠자의 한 사람.

1217년 그는 전진교의 제5대 장문인이 된다. 당시에 전란이 빈번하여 백성들의 삶이 고달펐고,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전진교에 가입하였다. 전진교는 당시 중국 북방지역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나이가 7순에 이른 구처기는 학발동안, 벽안방동(碧眼方瞳, 푸른 눈에 네모난 눈동자)를 지니고 있어, 사람들은 그가 "장생불로술"과 "천하통치술"에 정통했다고 믿었다.

이런 소문은 당시 아랍정벌에 나섰던 징키스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때 징기스칸도 이미 나이 60에 이른 상태였다. 그런데, 주변에서 구처기는 이미 300여살을 살았으니, 분명히 장생불로술을 알 것입니다라고 추천해주었다. 이러한 신선이 있는데 모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1219년 겸허하고도 간절한 어투로 글을 썼으며 유중록을 보내어 구처기를 모셔오도록 하였다.

 

처음에 징기스칸의 조서를 받아본 구처기는 매우 난감했다. 전진교는 일관되게 청심과욕(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내지 않는 것), 청정무위를 주장했다. 그래서 난세의 정치와는 관련을 갖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금나라와 남송에서의 요청도 뿌리쳤었다. 그러나, 구처기는 세상의 흐름을 읽었고, 몽고통치자는 아마도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전진교의 발전을 위하여 그는 결국 조서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그는 이 기회에 백성들을 위하여 몽고의 대한에게 무고한 사람을 조금은 적게 죽이도록 요청할 생각을 하였다.

 

1219년 12월, 구처기는 윤지평(尹志平), 이지상(李志常)등  18명의 제자를 데리고 산동을 떠났다. 다음 해 2월 20일, 그들은 몽고통치하의 연경(지금의 북경)에 도착했고, 현지의 관리, 사대부, 승려들은 노구교까지 나와서 이 징기스칸이 친히 부른 신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구처기에게 글을 받고, 서명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들은 구처기의 글을 호신부로 생각했고, 이로써 몽고대군으로부터 함부로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 아랍정벌에 나선 징기스칸은 갈수록 더 서쪽으로 멀리 갔다. 구처기는 연경에서 징기스칸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정표>>를 올려, 자기는 나이도 이미 많이 들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는 없으니, 나중에 징기스칸이 연경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유중록은 구처기가 뭘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하여, 예쁜 여자 아이를 몇명 보내주겠다고 건의했다가, 구처기의 분노를 자극한다. 유중록은 급히 징기스칸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징기스칸은 다시 조서를 내려 구처기로 하여금 서행하여 자신을 만나게 하라고 지시한다. 1221년 2월 8일, 구처기는 연로한 몸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리길을 나서게 된다. 새북고원을 지나 1년여의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다.

 

구처기가 징기스칸의 넷째 동생인 알진(斡辰)이 머물고 있는 바이칼호에 도착했을 때, 알진은 구처기에게 불로장생의 술법을 배우기를 청한다. 그러나 생각도 못하게, 구처기가 그에게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돌연 눈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알진은 크게 놀라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징기스칸보다 먼저 불로장생술을 알고 싶어하는 바람에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없던 일로 하자며 그만두게 된다.

 

서행중에 어려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 사막의 폭풍을 견뎌야 했고, 유사의 침습을 받아야 했다. 곤란에 처했을 때는 마차가 유사에 빠지기도 하고, 말이 멈춰서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하기고 했으며, 사람들이 한걸음 한걸음 나가는 것 자체가 모두 어려웠다. 구처기의 수행제자중의 하나인 조구고(趙九古)는 이 서행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1222년 초여름, 구처기는 마침내 대설산(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산)에 도착하여, 징기스칸을 만나게 된다. 징기스칸은 구처기가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그에게 장생술과 장생불로약에 대하여 묻는다. 구처기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위생(衛生)의 도리는 있으나, 장생불사약은 없습니다." "목숨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위생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생의 도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첫째는 잡생각을 쫓아내고, 둘째는 사욕을 줄이며, 셋째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후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구처기는 세세한 문제까지 징기스칸에게 권고를 했다. 한번은, 징기스칸이 멧돼지를 잡기위해 활을 쏘려고 할 때 갑자기 말의 앞발굽이 부러졌다. 그러나 멧돼지는 감히 징기스칸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이후, 구처기는 징기스칸에게 "하늘은 생명을 중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폐하는 이미 연세가 높으시니, 나가서 사냥하시는 것은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하늘이 폐하에게 그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멧돼지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한 것은, 하늘이 역시 폐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좌우 사람들에게 "신선의 권고라면 나중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번은 징기스칸이 다리를 건널 때, 다리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부러졌다. 구처기는 징기스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지 않는 몽고인드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조서를 내려 신선의 지시를 받아 효도를 다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구처기는 여러차례에 걸쳐 징기스칸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경천애민(敬天愛民,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과, 반드시 백성들의 고난을 이해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구처기가 처방한 이러한 약방문은 징기스칸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던 것은 아니었고, 징기스칸에의하여 100%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몽고통치자들의 한족에 대한 잔혹한 살육을 줄이는데 역할을 하였다. 강희황제는 이에 관하여 "말 한마디로 살육을 멈추게 하다니, 세상을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223년 봄이 되어, 구처기는 이미 징기스칸의 곁에 1년을 지냈다. 고원의 기후에 적응도 되지 않고, 고향이 생각나서 구처기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3월에, 징기스칸은 구처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에게 많은 금은재보를 주고자 하였으나, 구처기는 모두 거절한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전진교도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도록 칙령을 내리고, 기병 5천을 딸려보내어 그를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이 절절했던 구처기는 갈 때는 1년여가 걸렸던 거리를 돌아올 때는 4개월만에 온다. 징기스칸은 성지를 내려 귀향로가 순조로웠는지, 현재 거주하는 곳이 괜찮은지를 물어보고, "짐은 항상 신선을 생각하고 있다. 신선도 짐을 잊지 말아달라" 나중에, 징기스칸은 구처기에게 호부새서(虎符璽書)를 내려, 연경행성의 원래 금나라의 어화원을 구처기에게 주고 전진교의 도관으로 삼도록 해준다. 이 때부터, 구처기는 전진교를 널리 알리고, 도관을 널리 짓고,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게 되며, 몽고국의 국사의 지위를 얻게 된다. 호부새서로 구처기는 또한 많은 중국인들의 목숨도 구해준다. 몽고인의 약탈에 의하여 노예로 끌려갈 뻔했던 2,3만명의 사람들이 다시 자유를 얻게 해주었다.

 

1227년 구처기는 병으로 사망한다. 이 때 그의 나이 79세였다. 그가 죽은 후, 제자인 이지상은 <<장춘진인서유기>>를 편찬하였다. 그 책에는 이 서행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구처기가 지금의 몽고,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등의 국가를 지나갔으므로, 이 책은 나중에 13세기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1차적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