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유병충(劉秉忠) : 북경성의 설계자

중은우시 2008. 3. 24. 19:52

글: 해새장(解璽璋)

 

북경의 민간전설에 의하면, 유백온(劉伯溫)과 요광효(姚廣孝)가 북경성을 만들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들이 설계한 북경성의 설계도형은 나타()의 몸을 본따서 그린 "팔비나타성(八譬城)"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이다. 최근에 화청(禾靑) 선생의 <<쿠빌라이풍운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작자는 글에서 유병충이 원나라 대도(大都)를 건설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 유병충이 바로 북경성의 명실상부한 설계자이고, 유백온이나 요광효보다 개락 120-130년전의 일이다.

 

유병충(1216-1274), 자는 중회(仲晦), 처음 이름은 간(侃)이었으며, 나중에 화상(和尙, 중)이 되어, 법호를 자총(子聰)이라고 한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그가 충성스러움에 감복하여, 그에게 "병충(秉忠)"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이 사람은 <<원사(元史)>>에 전(傳)이 남아 있는데, 그에 대하여 "박학하고 다재다능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위로는 천문에서 아래로는 지리까지 잘 알았고, 특히 <<주역>>에 정통했다. "율력, 삼식, 육임, 둔갑술에 능했다" "천하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쿠빌라이에 있어서 제갈량과 같은 인물이다.

 

쿠빌라이가 천하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유병충은 큰 역할을 한다. 나중에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도 모두 그의 아이디어이다. 그가 제안한 것이라면 쿠빌라이는 모두 받아들였다. "관복을 공포하고, 조정의 의식을 거행하며, 봉록을 지급하고, 관료제도를 정하는 것들이 모두 유병충이 제안한 것이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유병충에게 용강(龍岡)에 성곽을 건설하도록 명하고, 3년만에 마친다. 그리고 이름을 개평(開平)이라 한다. 현재의 내몽고 다륜현(多倫縣) 부근이다. 1260년, 쿠빌라이는 칸을 선발하는 구제도를 폐지하고, 개평에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개평을 상도(上都)로 하고, 연경(북경)을 중도(中都)로 정한다. 이 해에 쿠빌라이는 연경으로 친히 행차하고, 금(金)나라의 과거 이궁(離宮)인 대녕궁(大寧宮)에 머문다. 4년후, 중도를 건설하는 계획이 상정된다.

 

중도를 건설하는 것은 유병충이 주재한다. 최초의 아이디어는 금나라의 옛 성을 기초로 재건하거나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4년(1267년)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옛 성을 포기하고, 새로 성을 짓기로 결정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성을 재건하지 않은 이유는 옛성이 불길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옛성의 동북방향에 새성을 짓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약간은 소설같은 느낌이 있다. 그래도 진실에 어느 정도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옛성은 원래 좁았고, 몽고군의 공격에 도성이 함락된 후, 황궁은 모조리 불에 타 없어졌다. 나중에 쿠빌라이가 연경에 행차했을 때도, 금나라 중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경화도(瓊華島)상의 대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큰 불은 한달간이나 탔었다고 한다. 많은 관리와 백성이 피살되고, 중도성은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원나라때를 통틀어 옛 성의 유적은 그대로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 대도의 건설공사는 두 단계로 나뉘어서 이루어진다. 제1단계는 지원4년(1267년)부터 성건설기관인 제점궁성소를 설립하여, 황성, 궁성, 궁전의 시공을 시작한다. 지원10년(1274년)에 정월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정전(正殿)에서 황태자 및 여러 왕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는다. 이날, 조하에 참석한 사람중에는 고려국왕이 파견한 사신인 이의손(李義孫)등도 있었다. 8월, 유병충은 황제를 모시고 상도로 가서 피서를 하다가 돌연 사망한다. 향년 59세였다. 아무런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59세는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아마도 피로가 쌓여서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죽은 후에도 원대도의 건설공사는 계속되고, 그가 정한 방안대로 진행된다. 다시 11년이 지나서, 즉, 지원22년(1285년)이 되어, 원대도의 건설은 일단락을 짓게 된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뿐아니라, 역대왕조가 건설한 북경성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기도 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지원12년(1275년)에 원대도에 오는데, 궁성이 막 완공된 때였고, 도성은 여전히 건설중이었다. 그래도 궁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여러 측면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물론 과장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후세인들에게 고귀한 자료를 남겨주었다.

 

여러 측면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원대도는 현존하는 북경내성(北京內城)보다 많이 넓었다. 현존 북경성의 기본 골격을 짰을 뿐아니라, <<주례. 고공기>>에서 주장한 유가의 도시건설사상에도 부합되었다. 전조(前朝), 후시(後市), 좌조(左祖), 우사(右社)의 제도에도 부합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당나라의 도성 장안을 연상하게 하였는데, 어떤 점에서는 모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의 외곽은 길이가 28,600미터인데, 남북방향이 약간 길어서, 장방형을 나타냈다. 남쪽 성벽은 지금의 북경성의 동서장안가의 남측이며, 북쪽 성벽은 지금의 덕승문, 안정문의 북쪽 5리지점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유적을 볼 수 있다. 동쪽 성벽은 동직문일선, 서쪽 성벽은 서직문일선이다. 북쪽 성문은 2개인데, 안정(安貞)과 건덕(健德)이다. 나머지 삼면은 모두 성문이 3개씩 있다. 동쪽의 3 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광희(光熙), 숭인(崇仁, 지금의 동직문), 제화(齊化, 지금의 조양문)가 차례로 있고, 서쪽의 3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숙청(肅淸), 화의(和義, 지금의 서직문), 평칙(平則, 지금의 부성문)이 차례로 있으며, 남쪽의 3분은 가운데가 여정(麗正), 동쪽이 문명(文明), 서쪽이 순승(順承)이다. 도시 도로계획은 아주 규칙적이며, 전체 성의 남북간선도로와 동서간선도로는 각 9개이고, 50개방(坊)으로 구분했다. 큰길은 너비가 24보(步)이고, 작은길은 너비가 12보(步)였다. 큰길과 작은길 외에 화항(火巷)과 농통(弄通)이 있어, 아주 장관이었다. 남송이 마지막으로 멸망한 후, 쿠빌라이제국의 강역은 동아시아, 동북아시아에서 동유럽의 광활한 대륙에 미쳤고, 이미 그 어느 도시도 웅대하고 화려한 한팔리(汗八里, 즉 원대도)를 따를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