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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유병충(劉秉忠) : 원(元)의 쿠빌라이의 군사

by 중은우시 2005. 9. 21.


 

 

유병충(Liu Bing Zhong; 1216-1274)

 

원나라 초기의 유명한 학자 겸 정치가이다.

 

자는 중회(仲悔), 원래 이름은 간(侃)이었으며, 하북성 형태현(邢台縣) 사람이다.

 

17세때 형주절도사부에서 영사(令史)의 직에 있었는데, 큰 뜻을 품고있어 지방의 작은 관리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1238년 사직하고 처음에는 도교의 일파인 전진도(全眞道)에 들었다가, 다시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법명은 자총(子聰)이고, 스스로 장춘산인(藏春散人)이라 했다. 사방을 유람하고 많은 책을 읽었다.

 

1242년 당시 북방선종의 우두머리인 해운(海雲)의 인정을 받아, 쿠빌라이(元世祖)의 참모로 추천받았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묻는 것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유병충을 매우 아껴 곁에 두었다. 이후 1247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잠시 형주에 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쿠빌라이를 따라다녔으며,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하는 중요한 참모가 되었다. 부친상을 당한 2년의 기간동안, 유병충은 형서 자금산에서 강의를 하여 곽수경(郭守敬), 왕순(王恂), 장문겸(張文謙), 장역(張易)과 같은 인재를 길렀다. 곽수경은 15,6세때 천문기기를 만들었으며, 유병충은 곽수경에게 천문, 지리, 기기제조방면의 지식을 전수해줘, 곽수경이 천문, 수리, 수학등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이루도록 하였다. 왕순은 수리쪽에 뛰어났는데, 유병충의 교육으로 산술에서 뛰어났을 뿐아니라 유명한 천문학자로 성장하였다.

 

쿠빌라이의 대업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유병충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와 거유들을 적극 추천했다. 그는 장문겸(張文謙), 장역(張易), 허형(許衡), 요추(姚樞), 두묵(竇默), 왕순(王恂), 마형(馬亨), 이덕휘(李德輝)등의 십여명의 재능있는 석학들을 모셔왔다. 이는 쿠빌라이가 몽고식의 구제도를 개혁하고, 중국식의 법률제도를 채택하도록 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유병충은 여러 해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쿠빌라이에 건의하여 형주(邢州)를 시범도시로 하여 정리정돈을 하여 경제를 회복하도록 하기로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251년 형주에 안무사(安撫使)를 두고, 이유간과 유숙을 정, 부 안무사로 임명하여 형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은 야철공업을 일으키고, 공용으로 지폐를 제조하고,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고, 역관을 설치하며, 양곡창고를 정돈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형주는 예전의 번영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순덕부로 승격되었으며, 동시에 형주는 사방에서 개혁의 모범으로 칭송되었다.

 

1260년 쿠빌라이는 황제에 올랐다. 유병충은 명을 받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중서성을 최고행정기관으로 하고, 추밀원을 두어 병권을 장악하도록 하였으며, 어사대를 두어 백관의 진급징계, 조정의식거행, 복식제정, 율력제정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1264년 쿠빌라이는 유병충을 광록대부, 태보, 참령중서성사, 동지추밀원사에 임명하면서 환속하게 하여 성을 유(劉)로 복귀하게 하고 이름을 병충(秉忠)이라고 내렸다. 1271년 유병충의 건의에 따라 쿠빌라이는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쳤다.

 

유병충은 또한 원나라의 수도를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로 정하도록 건의하고 대도의 건설을 책임졌다. 원래 1251년 쿠빌라이가 황제에 오르기전에 막남(현재의 내몽고)의 책임자로 있을 때, 그의 막사를 금련천으로 옮기고 1256년 유병충에게 명하여 새로운 성을 건설하게 하고 이름을 개평(開平)이라 하였으며, 후에 상도(上都)로 이름을 고쳤다. 1264년 유병충은 북경이 요나라와 금나라의 수도였고, 지리적으로 요충지이므로 북경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유병충은 원래의 금의 중도의 동북쪽에 대도성을 건설하였다. 대도성을 건설하고 천도한 것은 원나라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몽고의 관리들은 초기에는 봉급의 개념이 없었고, 모두 자신의 주머니에서 해결하였다.1254년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 쿠빌라이는 백관을 정하고 봉급을 정하였다. 그 외에 몽고에는 원래 관리의 직책을 정하지 않았던 것을 바꾸어 백관의 제도를 정하였고, 각급관리의 직무와 인원수 및 봉급을 정하였다. 이로써 원은 하나의 세련된 국가기구와 관료체계를 갖게 되었다.

 

유병충은 또한 시,사,서법에 뛰어났다. <<장춘집>> 6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해서는 수준급이었고, 행서는 한층 더 뛰어났다. 내구현 신두촌 원작산 신응묘에서 발견된 <<국조중수작산신응왕묘지비>>는 유병충이 쓴 글로서 그의 글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것이다.

 

유병충은 1274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나이 58세때였다. 그의 묘는 형태현성 서가촌에 있다. 사망한 다음해에 태보로 추증되고, 조국공에 봉해졌으며, 원인종때에는 다시 상산왕에 봉해졌다.

 

유병충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온다. 그는 항상 "부귀를 부운과 같이 가볍게 여기고, 공명은 몽환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하루는 쿠빌라이가 유벙충에게 백금천냥을 내렸다. 유병충은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며 "저는 그저 산야의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아주 운이 좋아 황제의 인정을 받아, 조정에서 받아먹고 살고 있습니다. 백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쿠빌라이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너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느냐. 그들에게 나눠주기라도 해라"라고 하니 더 이상 거절 못하고 그 백금을 받아 친척, 친구와 수하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