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진우량(陳友諒): 원말의 효웅

by 중은우시 2007. 11. 20.

글: 조녕우(趙寧宇)

 

원나라말기의 농민의거중에서 한때 가장 실력이 방대하였고, 거의 남방을 통일했었던 사람이 바로 유명한 진우량이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는 진우량이 아주 간사한 소인배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정사에서도 주원장의 명나라조정은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적수를 가능한 한 깍아내렸다. 그렇지만, 역사상의 진정한 진우량은 실제로 영웅호걸이었고, 중원을 차지하고자 했던 우두머리였다.

 

진우량은 호광(湖廣)사람이다. 일설에 의하면 호북 개양이라고도 하고, 일설에 의하면 호북 홍호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일설에는 남조의 사령운의 후손인데 진씨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진씨성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나라말기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진우량은 홍호지역에서 깃발을 들고 의거에 가담했으며, 자신의 무장세력을 갖추었다. 바로 서수휘(徐壽輝)가 이끄는 서로홍건군(西路紅巾軍)에 가담하였고, 천완(天完)정권의 주요한 장수중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천완정권의 주요한 장수로는 조보승(趙普勝), 추보승(鄒普勝), 예문준(倪文俊)이 있었다. 그 중에 예만자(倪蠻子)로 불리던 예문준은 서수휘에 불복해서 거병하였으나, 격패당한 후 진우량이 관할하던 황주지역으로 도망쳐 왔고, 진우량에 의하여 생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진우량은 이를 기화로 예문준의 무장세력을 병합하였으며, 천완정권의 실권자로 떠올랐다. 이후 진우량은 군대를 이끌고 사방을 다니면서 전투를 했다. 호광의 경계외에 강서, 안휘, 절강등 여러 곳을 공격했고, 각지 무장세력중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때, 진우량의 야심은 팽창했다. 그리하여 먼저 천완정권의 명장 조보승을 죽이고, 나중에 의거의 우두머리였던 서수휘도 죽였다. 이리하여 천완정권은 다시 새로운 "대한(大漢)"으로 개조되었다. 진우량은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추보승, 장정변(張定邊)등의 대장을 거느렸다. 이때의 진우량은 백성을 잘 돌봐서 인심을 얻었다. 호광일대는 병사도 정예였고, 군량미도 충분했다. 서수휘의 옛부하들도 거의 다 진우량에 병합되었다. 다음번은 천하통일의 단계였다.

 

진우량이 채택한 전략은 아주 분명했다. 동으로 주원장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서방의 사천은 이미 서수휘때 파견한 명옥진(明玉珍)이 들어가서 장악하고 있었고, 남방의 광동광서는 그다지 전략적인 가치가 크지 않았다. 북방은 원나라정부와 각로의 홍건군이 싸우고 있어서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좋은 전략은 동으로 가서 주원장을 정벌하고, 다시 장사성(張士誠), 방국진(方國珍)등의 할거세력과 원나라의 잔여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따. 이리하여 강소안휘의 비옥한 대지를 확보하게 되면 광범위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게 되어, 남정북벌이 모두 가능하고, 유연의 땅(원나라수도지역)도 칠 수 있게 되며, 대한정권의 하늘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황제를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우량의 면전에 나타난 것은 가장 상대하기 힘든 주원장집단이었다. 첫번째 진공에서 진우량은 주력부대를 옮겨서 일거에 주원장의 서오(西吳)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계산은 하늘의 계산을 따르지 못한다고 진우량의 대군이 연이어 서오의 보루를 격파하였는데, 남경의 외곽에 상륙한 이후 강동교 일대에서 주원장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돌아갔다. 나중에 진우량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전력을 기울여 강을 따라 내려와서 서오를 진공한다. 그리고 전략요충지인 홍주(남창)으로 향한다. 이때, 서오의 주력부대는 마침 북상하여 안풍에서 한림아와 전투중이었다. 그리하여 남쪽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만일 진우량이 홍주를 점령하였다면, 자연히 명나라군대의 후로를 차단한 것이 될 것이고 일거에 비어있던 남경으로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홍주는 주문정(朱文正), 등유(鄧愈)등의 명장이 80여일을 사수하였고, 주원장, 서달, 상우춘등이 이끄는 부대가 포위망을 풀어줄 때까지 버텼다. 대한과 서오의 두 대군은 파양호에서 대전을 벌이는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서오의 군대는 중요한 시기에 화공을 써서 대한의 군대를 격파한다. 진우량은 비록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병력이 탄탄해서 계속 새로운 전투를 이어갔다. 운명은 그들을 갈라놓았다. 진우량은 작전중 배를 바꿔타다가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이리하여 대한의 군대는 대패하게 된다. 진우량이 패망한 후 그의 부하는 속속 주원장에 투항했다. 단지 장정변만이 진우량의 아들을 데리고 무창으로 도망쳐 온다. 나중에 서오의 병사들이 무창성에 다다르자, 진리, 장정변이 투항하고 대한은 멸망한다.

 

진우량의 일생을 살펴보면, 원나라말기 농민의거군에서 뛰어난 사나이이며, 그가 한 행위는 확실히 난세효웅의 기준에 들어맞는다. 간악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주원장과 진우량을 비교하자면, 그들의 행위는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주원장은 성공했고, 진우량은 실패했을 뿐이다.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도적인 것이다. 주씨의 명나라왕조는 죽어라 진우량을 폄하했다. 나중에 김용의 <<의천도룡기>>까지 나와서 진우량은 더욱 죽일 놈이 되어 버렸다.

 

대한정권이 멸망한 후, 마음 씀씀이가 그다지 넓지 못했던 주원장은 진우량을 도와주었고 거의 자기를 소멸시켜버릴 뻔했던 호광의 전사들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가족들 백만을 강의 배에 남겨두고 육지에 내려서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은 남중국의 강하를 떠돌면서 쓰레기를 줍거나, 기예를 팔거나, 매춘하는등 천한 일들을 하였다. 이 배는 "홍선(紅船)"이라고 불렀다. 명나라때, 수백만의 홍선 자제들은 새로운 삶을 희망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되어서야 그들은 이러한 천민의 지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청나라의 이러한 조치도 물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지, 마음이 고와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 오삼계를 위해 싸웠던 10만의 운남관병과 가족들을 전국의 역참으로 보내서 일하게 하였는데, 이들도 아주 힘든 생활을 했다. 이것도 주원장의 조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만일 진우량이 주원장을 이겼다면, 서오의 병사들이 강위의 홍선으로 보내어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