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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10년간 228차에 걸쳐 105만위안(약1억2500만원)의 빚을 갚은 부부

by 중은우시 2006. 7. 12.

 

뒷줄은 빚을 갚은 장주 부부

앞줄은 채권자 왕순옥 부부

 

상해에서는 <<천경지의>>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드라마을 상해시 양포구에서 찍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실제 이야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바로 장주(章鑄)와 나봉선(羅鳳仙)부부가 10년동안 고생을 하여 총 228번으로 나누어 36명의 채권자에게 105만위안의 채무를 갚아나간 이야기이다.

 

105만위안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증권시장이 활황이던 1991년, 주식투자로 하룻밤에 졸부가 되었다는 신화와 같은 얘기들이 번져나갈 때였다. 아들을 해외유학보내고자했던 장주부부는 집안의 10만위안의 저금을 끄집어내어 비상장주를 살 수 있다고 하는 왕양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왕양이 수백만위안을 사기친 죄목으로 무기징역의 형을 받을 때, 장주부부는 이미 그에게 자기의 10만위안외에 105만위안을 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돈은 바로 그들이 1년여동안 친구와 동료들에게 빌려서 투자한 것이었다.

 

장주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기를 당하다니, 그러나 절대 36명의 무고한 채권자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장주부부는 절망의 나락에서 다시 일어섰고, 채권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약속했다. 평생을 바쳐서라도 채무는 반드시 다 갚겠다고. 그러나 당시 월급여 400위안에 불과했던 그들로서는, 이미 집안에 모아놓은 돈도 다 써버렸으므로, 이와 같이 약속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꼴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일하던 상해방직축승공장을 떠났고, 돈을 벌어 빚을 갚는 길로 들어섰다.

 

나봉선의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황승옥은 그들의 채권자였다. 장주 부부가 첫번째로 돈을 갚던 날의 광경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1994년 구정 전날 밤이었다. 나봉선은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500위안이 든 봉투를 황승옥의 손에 집어주었다. 이 해에 장주 부부는 카페트까는 일, 물건 나르는 일, 잡일, 카운터 보는 일을 하면서, 돈을 아껴써서 1만2800위안을 모았다. 그들은 채권액의 비율에 따라 이 돈을 여러 개로 나누었다. 500위안, 300위안, 가장 작은 것은 50위안도 있었다. 나봉선은 집집마다 찾아갔다. 황승옥은 비록 채권자들이 받은 것은 채권액의 1%에 불과하였지만, 모두 장주 부부의 진실된 마음은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매년 구정이 되면, 나봉선은 한집 한집을 방문해서, 조금씩 조금씩 빚을 갚아갔다. 둘째해에는 2.2만위안, 셌째 해에는 3.52만위안...년말마다 빚을 갚는 것은 장씨 집안의 '관례'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장주는 너무 힘들게 일을 해서 두 번이나 사고를 당했다. 한번은 분쇄성 골절을 당했고, 한번은 손가락을 잘렸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던 셋째 해에, 장주의 예전 공장장이면서 그들의 채권자인 진자봉이 찾아왔다. 장씨의 힘든 생활을 본 그는 "너희들이 진 큰 빚은 이렇게 깍두기나 먹어가며 아껴가지고는 갚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장주는 기술이 좋으니, 특기를 살려 스스로 창업하는 건 어떻겠는가?"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작은 가내공장을 차렸다. 장주는 기계방면으로는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었다. 집안에 작은 공장을 차리고, 한 공장에서 쓰지 않는 설비를 가져다가 약품허가번호인쇄기를 생산했다. 부부는 노동자 겸 판매원이었다. 그들은 첫해에 10만위안을 벌었다. 그들은 그 중 8만위안을 가지고 빚을 갚았고, 2만위안은 재생산에 투입했다.

 

장주는 잡기 힘든 시장의 기회를 붙잡고, 생산규모를 점점 키워갔고, 가내공장은 회사로 성장했다. 회사의 경영목표는 돈을 벌어서 빚을 갚는 것이었다. 그는 회사가 1년에 1만위안을 벌면 그 중 8천위안은 빚을 갚는데 쓰는 것으로 정했다. 부부는 그들의 회사를 "채무변제회사"라고 불렀다.

 

어려웠던 10년간의 채무변제 생애를 회고하면서, 장주가 가장 감사하는 것은 묵묵히 기다리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채권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을 언급할 때마다 장주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당초에 장주가 채권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했을 때, 36명의 채권자들은 이렇게 서로 약속했다. 절대 장씨 부부를 독촉해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말자. 사정이 특수했으므로, 법원도 장주의 채무변제를 잠시 연기하도록 판결했다. 법정에서 채권자인 반모는 장주의 손을 붙잡고, 몸조심하라고 격려했다. 몇천원에 서로 주먹질하는 모습에 익숙했던 법관은 매우 감동했고, 이런 채권채무소송과 채권자, 채무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장주부부는 호옥하에게 5천위안을 빚졌는데, 장주부부가 사기당해서 거액을 손해본 것을 알고는 호옥하는 나봉선에게 내 돈 5천위안은 잃어버린 것으로 칠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대학시험준비중인 아들의 앞날을 망치지는 말라고 했다. 이후에도 호옥하는 매월 학교로 가서 장주부부의 갓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방문하고 과일과 먹을 거리를 가져다주곤 하였다.

 

어느 구정날 다음에 장씨 집에 나이든 부부가 찾아왔다. 남자는 당씨이고, 부인은 조씨였다. 그들은 장주부부의 7.4만위안의 채권자였다. 당씨는 "원래 더 일찌기 너희를 보러 오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오해할까봐 찾아오지 않았었다. 오늘 찾아온 것은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이다. 돈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다. 너희가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반년이 지난후 당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주부부는 이 때서야 당씨부부가 그들을 찾아올 때 이미 백혈병진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그날 밤 했던 말을 생각하면 부부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2000년, 장주는 마침내 당씨의 부인 조씨에게 1만위안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도 못했던 것은 조씨마저도 암말기환자였던 것이다. 이 부부는 그들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수만위안의 빚을 진 장주부부에게는 일체 알리지도 않고 독촉도 않았던 것이다. 깊이 감동한 장주부부는 조씨가 사망하기 전에 모든 빚을 갚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은 평생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장주는 말한다.

 

장주부부의 성의와 끈기와 채권자들의 관용은 마침내 기적을 창조했다. 2001년말, 회사가 수년간 낸 이익과 법원을 통해 사기꾼으로부터 회수한 10만위안, 그리고 아들이 대학졸업후 HP회사에서 일하면서 벌어서 보탠 돈을 합쳐서, 장씨집안은 마침내 105만위안의 돈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가장 생활이 어려웠을 때, 장주는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나봉선에게 여러가지 말을 전하였다. 그 중의 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내가 감히 예언하건데, 우리가 이 100만여위안의 빚을 다 갚을 때에는 우리가 노력한 가치는 절대 100여만위안보다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