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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2005년 중국경제계의 비극적인 인물 5명

by 중은우시 2006. 6. 8.

1. 고추군(顧雛軍, Gu Zou Jun)

 

1959년 강소 태현 출생

1988년 9월 거린커얼 제냉제 발명

1995년 거린커얼중국유한공사 설립

2001년 커롱(科龍)전기 인수

2005년 8월 12일, 커롱전기 동사회에서 고추군의 동사장직위 박탈

2005년 9월 고추군 정식 구속

 

거린커얼을 홍콩 2부시장에 상장한 때로부터 커롱을 인수할 때까지, 국내기업인 야싱(亞星)객차를 인수한 때로부터 구주자동차배건회사와 자동차설계회사를 인수할 때까지, 일련의 시장에서의 성공과 배후에서의 자금조달능력은 고추군에게 화려한 광환을 씌워주었다. 그런데, 고추군이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은 이것보다는 홍콩의 대학교수인 랑함평과 국유자산유실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면서이다. 그러나 순식간에, 낭고지전이 시작된지 1년이 되지않아 고추군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의 낙마는 사람들에게 자본무대에서 신화적인 춤을 추던 사람에게도 반면에 곰씹어볼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외에 중국자본시장에서의 각종 문제에 대한 경계심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아마도 이 비극적인 인물이 이 시대에 남긴 공헌이랄 수 있을 것이다.

 

2. 장해(張海, Zhang Hai)

 

1974년 5월출생, 하남 개봉 출신

2002년초 장해는 절국투의 명의로 "건력보(健力寶)"를 순식간에 인수함으로써, 국내최대음료회사를 보유하고 동사장 겸 총재가 되었다. 나이 28세때였다.

2004년 8월, 주주들에 의하여 건력보에서 쫓겨나다.

2005년 3월, 장해는 광동불산시 공안국에 의하여 형사구속되다. 죄명은 거액자금의 횡령

 

소년시절에는 기공대사로 이름을 떨치고, 청년시절에는 자본시장을 종횡하였고, 31세에 불과한 나이고 억만장자가 되었다. 자본운영을 잘하여 "자본대악(資本大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합쳐서 장해에게는 신비롭고 전설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불행한 것은, 건력보는 이러한 전설의 종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장해가 건력보를 운영한 2년동안 음료를 주업으로 하던 건력보는 건력보브랜드로 자본운용을 시작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영업분야에서 계속되는 실책과 자본운영분야에서의 무실적으로 인하여, 건력보는 날로 쇠퇴하였고, 자본운영의 신화는 물거품이 되었다. 건력보가 없었거나, 건력보가 아니었다면 장해는 아마도 자본운영의 대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누렸을지,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악명을 짊어졌을지? 답은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장해가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 속도는 그가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온 속도만큼 빨랐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3. 장은조(張恩照, Zhang En Zhao)

 

1946년 12월생, 산동여현출생, 복단대학금융관리전공졸업

1964년 중국건설은행 상해시분행 입행

2000년 2월 중국건설은행 제1부행장, 당위 부서기

2002년 1월 중국건설은행 행장, 당위 서기 겸 중국국제금융유한공사 동사장

2005년 6월, 기율검사기관의 조사착수

 

중국의 은행계통은 역대이래로 백성들과는 유리되어 하나의 계통을 이루고 있다. 일반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높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어도, 비내리는 날 유리창을 통하여 방안의 풍경을 쳐다보는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장은조는 이러한 일반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 방에서 40여년을 보냈다. 40여년동안 매우 순조로웠고, 빈민중에서 성공한 전형적인 사례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전임자들중에 마지막에 명성을 훼손시킨 사람들처럼 결국 그도 무너졌다. 100만달러의 뇌물이라는 돌맹이는 무겁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는 도망칠 수도 없었고, 장은조의 낙마는 금융계의 병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감독매커니즘이 작동하는지에 대하여도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2005년 중국금융계의 가장 핫이슈였다.

 

4. 마지평(馬志平, Ma Zhi Ping)

 

2002년 4월, 마지평은 개인소유의 강소천창과 상장회사인 남경웅묘(Panda)와 합작하여 웅묘이동을 설립하였고, 마지평은 웅묘이동의 총재가 되었다.

2002년말, 마지평의 노력으로 웅묘핸드폰은 2003년도 핸드폰업계에서 CCTV가 선정한 우수브랜드로 뽑혔다.

2004년, 마지평의 강소천창이 상장회사인 남경웅묘의 15.9억위안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점용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다.

2005년, 마지평은 "허위출자죄"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3대브랜드핸드폰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지평은 지금은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이전에 그는 자본시장에서 날리던 인물이었다. 만일 상해 이메이(易美)의 생산중단이 직접 마지평을 걸고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아마 그는 핸드폰시장을 질타하고 있었을 것이다. 웅묘이동의 CEO를 맡은 기간동안, 마지평이 진행한 일련의 복잡한 자본거래는 웅묘이동으로 하여금 12억위안의 채무를 안도록 하였고, 거액의 자금을 블랙홀로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평은 스스로 파놓은 이 블랙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웅묘가 그를 끝장낸 것이다. 마지평사건이 집중적으로 드러낸 것은 국내자본시장의 관리감독문제, 회사지배문제, 업계관리문제, 국유자산관리문제, 사회신용문제등의 여러 방면에서의 헛점이었다. 사회는 앞으로 전진하려면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아마도 마지평의 실패는 중국업계관리와 회사지배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조신선(趙新先, Zhao Xin Xian)

 

1941년 4월 요녕성 영구시 출생

1985년, 조신선은 몇명의 대학생을 데리고, 남방의원에서 나와서, 남방제약공장을 차림.

1991년, 삼구집단(三九集團)으로 발전함.

2001년, 상장회사자금 불법점용으로 삼구집단과 조신선은 증감회의 벌금과 조사를 받음.

2004년 5월 16일, 조신선은 은퇴를 선언

2005년 11월, 조신선은 형사구속됨

 

2005년 최후의 비극적인물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연말의 찬바람 속에서 드러났다. 일찌기 삼구집단의 핵심인물이었고, 삼구라는 배를 19년간 몰았던 조신선이었다. 이전의 많은 인물들과는 달리, 조신선의 낙마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있다. 일찌기 조신선은 중국개혁개방의 발걸음에 맞추어 온갖 고난을 헤치고 남국에서 전설을 이룩했다. 삼구집단의 성장과 더불어 본인은 중국 중약현대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고, 여러 상도 받았었다.

 

그러나, 조화롭지 못한 소리들이 기업의 발전과 더불어 나타났다. 창립이래, 삼구집단은 조신선 한 사람이 모든 직위를 겸직했다. 발전초기에는 조신선이 한마디 하면 그것으로 끝났으며, 이것은 기업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이런 방식은 기업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현재 삼구집단의 전체적인 은행채무는 107억위안에 달한다. 삼구문제는 미디어들도 삼구난상이라고 할 절도이다. 비록 삼구시스템, 삼구정신등 일시적으로 업계를 선도하기는 하였지만, 삼구는 중국국유기업의 일종의 기형아이다. 일찌기 창업에 성공하여, 조신선은 지고무상의 권위를 가지고 잇었고, 삼구집단은 갈수록 조신선 1인기업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1인기업인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정확할 수는 없다. 이것이 조신선에게는 2005년 영웅말로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기업은 강호방파가 아니다. 한사람의 기업은 반드시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