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북경의 황사현상이 심해지면서, 심지어 천도를 언급하는 중국인들까지 나타났다. 북경이 왜 중국의 수도가 되었는지? 북경의 장점은 무엇인지? 지금도 수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북경은 화하문명의 북단지역이며, 담장을 넘어가면 오랑캐의 지역이다. 북경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남으로는 광활한 한족의 문화지역을 등지고, 북으로는 북적을, 동으로는 동이를, 서로는 서융을 마주하는 지역이다.
북경은 북경의 유리한 점이 있고, 역대 왕조는 모두 북경을 수도로 하는데 그러한 장점을 보았기 때문이다.
금(金)나라때, 북경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을 바라보고, 남으로난 중원을 압도한다. 즉, 북경의 지리환경에서 수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북경은 지리위치에 독특한 점이 있다. 중원의 북쪽을 향한 문이면서, 어떤 사람은 북경을 용의 눈(龍眼)에 해당하는 위치로 보고 있다. 북경은 편평한 평야를 마주하면서 높은 산을 등지고 있다. 남으로는 대운하로 강소절강에 연결되어 있고, 북으로는 사막과 연결되어 있다. 전국의 재화가 모여드는 곳이면서 천험의 지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봉, 낙양, 서안, 남경이 모두 이에 미치지를 못한다.
원(元)나라때, 북경에 도읍을 삼는데, 몽고족들은 북경을 동서지세의 교차점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았고, 남쪽을 향하여 군림할 수 있어, 진격하면 전국을 장악할 수 있고(실제로 북경에서 남으로 진격한 역사적인 군사행동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몽고철기병의 남하, 연왕 영락제의 남하, 청나라병사의 남하등), 물러나면 고향인 몽고사막이다. 금은주보를 모아서 말을 타고 한번 달리면 바로 고향으로 숨어버릴 수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북경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수도를 정하는 원칙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명(明)나라때, 북경에 도읍을 삼은 것은 약간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서달(徐達, 주원장을 도운 최고의 장수)이 유백온(劉伯溫, 주원장의 군사)의 뜻에 따라 활을 쏘아 수도를 정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마치 북경성이 수도가 된 것이 매우 우연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 명나라때 북경으로 천도한 것은, 충분한 역사, 문화, 정치, 군사, 경제, 개인감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중국문명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결과이다. 명나라가 개국하면서 수도를 남경에 정했는데, 여기에서 전국을 통치하였고, 이것은 명나라때 사람들의 수도를 정하는 원칙에 부합하였다. 그러나, 몽고세력이 몽고사막으로 돌아가 대치중이었고, 언제든지 권토중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전력을 다하여 북방을 방어하지 않으면 제2의 송나라와 같이 될 수도 있었다. 북경의 지리적 위치는 교통의 요충이어서 북경을 장악하면, 서북과 동북을 통제할 수 있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4개의 관문을 막을 수 있다. 북경성밖에는 태행산, 군도산, 연산이 있어 지세가 험준하고, 명나라사람들에 의하면 "형세가 천하제일이며, 층층이 산이 있고, 강이 있어, 금탕의 견고함을 지니고 있어, 만고제왕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청(淸)나라때 북경에 도읍을 삼은 것은 중원을 탄합하고 천하를 웅패하려는 야망과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사시 산해관너머로 도망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도르곤을 위시한 청나라조정의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관내로 진입하고자 하였고, 반드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북경을 점거함으로써 전국을 통일하고 만년동안 동요하지 않는 기업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1644년 8월 20일부터 청나라는 천도하였고, 10월 10일 정식으로 북경을 수도로 하게 된다.
300년후에, 중국혁명이 성공을 거둔 위대한 시점에,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은 전국인민의 의지를 대표하여 북경을 중국의 수도로 삼는다.
북경을 정함에 있어서도 여러가지의 이유와 근거가 있다. 일대의 위인인 모택동의 탁견이 작용하였고, 중국의 수도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북경은 중국역사상 전국을 통일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모택동을 위시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수도로 정한 역사적인 배경이다. 모택동은 중국역사를 잘 알았고, 역사적인 작용에서 볼 때, 북경을 수도로 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북경은 중국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선도적인 작용을 하였다. 1919년 천안문에서 폭발한 5.4운동은 중국신민주주의혁명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 혁명이 승리하면서 인민들은 혁명의 발상지를 잊을 수 없었다. 1949년 3월 25일, 모택동이 북경(당시 북평)성으로 진격하면서 탁현에서 기차를 타고 북경 청화원에 도착했다. 기차가 북경성벽을 지날 때, 모택동은 창밖으로 쓸쓸한 광경을 보면서 주변의 동지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북경에 와봤느냐? 나는 와봤다. 꼭 30년이 되었다. 그 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할 진리를 찾기 위하여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도중에 바지까지 누가 훔쳐갔었다. 고생도 많이 했다. 이제 31년후에 다시 옛곳으로 오니, "현도관 안에 있는 복숭아나무 수천그루는 모두 유랑이 떠난 후에 심은 것이구나"라는 싯귀가 떠오른다. 다 바뀌었다. 다 바뀌었어" 그렇다. 바로 북경에서 시작된 혁명전통은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따. 여기에서는 무술정변도 시작되었고, 암흑같던 봉건시대에 하늘에서의 하나의 빛이었다. 여기서는 반제반봉건의 난주의거도 시작되었다. 그것은 신문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5.4운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사상의 토양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북경에 수도를 정한 것은 혁명발전의 합리적인 결과였다.
당연히 북경을 수도로 정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치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장개석의 반인민 정부는 남경에 있었다. 모택동은 인민 정부는 북경에 있어야 했다. 모택동은 "장개석의 수도는 남경에 있다. 그의 기반은 강소절강의 자본가들이다. 우리는 수도를 북경에 정한다. 우리는 북경에서 우리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노동인민이다."
모택동은 일찌기 북경을 수도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산서의 군벌인 염석산이 중국공산당의 부대에 길을 양보하지 않자 모택동은 "태원은 보기에 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북경은 치지 말라" 그 이유는 북경은 완벽하게 보존해서 수도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북경을 평화적으로 접수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일체의 역량을 동원하고, 북경방어사령관인 부작의 장군과 상층 장군들에게 많은 노력을 들인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강대한 군사력과 정치적인 공세하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부작의는 1949년 1월 30일, 평화적인 개편에 동의하고 북경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킨다. 고도 북경은 이렇게 하여 완전하게 보존하게 된다. 북경의 모든 명승고적들도 완벽하게 보호되고 전혀 손상당하지 않으며, 도시안의 생활도 모두 정상을 유지하였다.
정식으로 북경을 수도로 정한 것은 1949년 3월 5일에 개최된 중공제7기2중전회에서 였다. 여기서 모주석은 "바라건데 4월 또는 5월에 남경을 점령하고, 그 후에 북경에서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북경을 수도로 하자" 북경에 중앙정부를 성립하는 것은 당시 많은 민주인사들이 공감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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