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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소설 영웅문: 주원장(朱元璋)은 명교(明敎)의 인물인가?

by 중은우시 2006. 4. 26.

김용의 <<의천도룡기(한국에서는 영웅문 시리즈로 번역)>>를 읽어본 독자라면 고수들이 운집한 궤이한 사파 명교(明敎)를 기억할 것이다. 소설에서 명교는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의거를 일으키고 조직한 단체로 나오고, 당시의 일부 진실로 존재했던 풍운인물, 한산동(韓山童), 팽영옥(彭瑩玉), 곽자흥(郭子興), 진우량(陳友諒), 주원장등이 책에서는 모두 명교의 신도로 열거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선량하지만 유약했던 교주 장무기는 사람들의 오해를 받아 스스로 미인과 함께 은거하고, 주원장이 대권을 빼앗는다. 주원장은 정권을 잡은 후 국호를 "명(明)"으로 하였는데 이것도 명교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소설가의 글을 믿을 것은 못된다. 그러나 김용은 역사와 문화, 민속등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인물인데, 과연 명교와 주원장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명교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했고, 한때 유행했던 마니교이다. 백수이가 편찬한 <<중국통사>>에서는 "마니교는 당나라때 중국에 들어왔고, 안사의 난(안록산, 사사명이 일으킨 난) 때 막북 회흘한국으로 들어왔다. 회흘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중국에서 마니교를 보호하였다. 840년에 회흘이 서쪽으로 이전한 후, 회흘인은 마니교를 가지고 지금의 투루판일대의 지구에 들어갔다. 내지의 마니교는 비록 당나라정부에 의하여 금지되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주로 동남연해의 민간에서 유전되었다. 마니교는 광명을 숭배하므로 명교라고도 칭한다"고 썼다. 이로써 볼 때, 명교는 민간의 비밀종교가 되었다. 오대때의 진주의 마니교교도들의 의거와 북송시기의 방구의거는 명교 교도들이 조직한 의거에 해당한다.

 

비교적 확실한 사료에 따르면 원나라말의 홍건적의 난은 "백련교"에서 시작된다. 원나라로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백련교는 "의술, 점술을 하는 것으로 위장하거나 장사하는 것을 위장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교를 전하고 제자를 모았다" 이로써 백련교는 가장 널리 보급되고 활발하였던 민간의 종교조직이었다. <<명사.열전10>>에는 "원나라 말에 한림아의 부친인 한산동이 요사스러운 말을 퍼뜨렸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면 미륵불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남, 강소, 절강일대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를 많이 믿었다. 교주사람인 유복통은 그 무리인 두준도, 나문소, 성문욱등과 함께 '한산동은 송나라 휘종의 팔대손이며, 당연히 중국의 주군이다'라고 퍼트렀다. 흰말과 검은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병사를 일으켰으며 홍건을 표시로 삼았다" 이 글에서는 두가지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반란의 목적이 "송나라를 회복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유복통이 한림아를 황제로 세우면서 국호를 "송"으로 한다. 둘째는 백련교의 불교적 성격이다. 연화와 미륵불은 모두 불교의 상징물이다. 명왕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선전과 한림아를 소명왕이라고 칭하는 것, 대명이라는 국호는 모두 불교경전에서 따온 것이고, 백련교의 교의에서 따온 것이다. 나중의 백련교의 수령인 당채아는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불모(佛母)'라고 칭하였다.

 

그렇다면, 백련교는 명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백련교의 교의를 보면 명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백련교의 해석에 따르면, 세계에는 두개의 존재 즉 명과 암이라는 양종이 상호 투쟁하고 있는데, 명은 바로 광명이며, 선량함과 진리를 대표하고, 암은 암흑으로써 죄악과 불합리를 대표한다. 이 두 방면에서 과거, 현재와 미리는 모두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오면 광명이 최종적으로 암흑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명과 암은 바로 명교의 기본교의에 다름아니다. 추상적인 광명지부가 실체화된 미륵불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외에 백련교의 교도들은 일상적으로 예배를 하였는데, "교도들은 밤에 모여 등을 켜고 영문을 낭송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교의 의식과 매우 유사하다.

 

원말명초에 명교는 매우 쇠약하여 전혀 호소력이 없는 종교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백수이의 <<중국통사>>에 따르면, "온주에는 마니교교도들이 집중된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잠광원이 있고 명교의 사원이다." 이런 글들에 따르면 동남지방에는 명교가 여전히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또 하나의 일파가 백련교와 관련되는데 바로 미륵교라는 비밀민간조직이다. 강호를 종횡하던 서수휘, 팽영옥등의 부대이다. 그들의 교의도 대체로 비슷했다. 기본적으로는 명교, 백련교, 미륵교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원말의 대동란때 세 종교는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동방의 <<세설명조>>에서는 '이 혁명단체의 진정한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고증하기는 어렵다. 외견상으로는 반공개적인 일종의 종교였고, 어떤 때에는 "명교"라고 하고, 어떤 때에는 "백련교"라고 하며, 어떤 때에는 "미륵교"라고 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구호는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의 명왕이 된다"는 것이었고, 그들의 주요한 계율과 활동은 향을 피우고, 등을 밝히고, 채식을 하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원나라 지정11년 5월, 명왕 한산동이 해를입어 죽고, 유복통이 반란을 일으킨다. 다음해 춘2월, 곽자흥과 손덕애등은 호주에서 일어난다. 주원장은 그 때 반란에 가담한다. 그때는 천하가 어지러운 때였고, 붕궤되기 직전이었으며 이미 할거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강력한 호족세력들은 병마를 모으고 있었고, 각지를 정복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종교로 사람을 모으거나 조직할 필요가 없었고, 교의를 더이상 널리 알릴 필요는 없었고, 예배나 주문이나 향을 피우거나 등을 밝히는데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말하면 주원장은 백련교나 명교의 신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시대의 흐름을 따랐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반란의 무리에 가담한 백만대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당연히 주원장은 보통의 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나라 지정11년 3월에 반란군에 들어간 후 24년 1월에 남경에 진입하여 왕위에 오르기까지 13년간 주원장은 군웅을 정복하고,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진우량을 격파하며, 장사성의 부대도 물리쳤다. 이로써 강남이라는 천하의 절반을 장악했다. 명나라라는 국호도 명교에서 따왔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건국후 주원장은 홍무3년에 "좌도"를 금지하였는데, 명교와 백련교도 함께 금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