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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연속극 <<전기황제 주원장>>에 대한 감상

by 중은우시 2006. 10. 16.

작자: 초술굉(焦述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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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동안 희설(戱說, 야사와 같이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 매우 유행하여, 영화드라마계를 휩쓸고 있다. 역사인물에서 신화인물까지, 제왕장상부터 문인소객까지, 황후비빈에서 재자가인까지, 거의 모든 계층의 일이나 사람이 포함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금 유명하기만 하면, 일정한 영향력이 있기만 하면, 모두 끌어내서 희설 한바탕을 벌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는 희설뿐아니라 '추화(醜化)'하기까지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희설'이나 '추화'의 기풍은 장려할 것이 못된다. 특히 중국의 역사사건과 역사인물은 역사를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예술적으로 가공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후대에 중국의 역사를 교육시킬 것인가와도 관계된다.

 

CCTV 채널8에서 막 방영하고 있는 50부 역사대하드라마 <<전기황제 주원장>>은 소문으로는 3000만인민폐를 들였다고 한다. 연기자들의 진용도 대단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방영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시청자들이 모두 욕을 하고 침을 뱉는 정도에 이르렀다. 어떤 포탈사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6%의 시청자들이 매정하게도 1점의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서 볼 때, 인민대중의 눈은 눈처럼 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대중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로부터 전혀 동떨어진 희설에 대하여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원장은 거의 서문경 수준이고 "위소보의 황제판"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대중은 명나라의 개국황제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데는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원장은 하층농민가정에서 태어난 개국황제이고, 중국역사상 유일한 경우이다. 개국황제로서, 그는 뛰어난 바 있다. 그는 아주 개성있는 정치가이고 군사가였다. 모택동 주석은 일생동안 명나라역사를 특히 중시했는데, 주원장에 대하여는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는 모택동의 일생에서의 그가 명나라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모택동은 <<심원춘. 설>>에서 역대 중국의 유명한 제황들을 욕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 징기스칸까지. 그러나 유일하게 주원장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모택동 주석의 마음 속에 주원장이 차지하는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농민반란군의 고급장수로서 그는 작전이 기민하였고, 결국 여러 장수들중에 뛰어나서 홍건적의 유명한 청년장수가 된다. 원나라 통치를 무너뜨린 후에는 지주계급과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른 할거세력들을 무너뜨리고, 명나라 정권을 세운다. 명나라 초에 정복전쟁을 거쳐 기본적으로 중국을 통일한다.

 

개국황제로서, 주원장은 아주 탁월한 업적을 세웠다. 만일 한 마디로 그의 치국방략을 설명한다면 "이맹치국(以猛治國, 사나움으로 나라를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장악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역사상 중앙집권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물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고, 그의 정책에는 장점과 함께 단점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관리제도를 엄격히 하였다. 유리한 일면은, 관교사회를 숙연하게 하였고, 각급관리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하나 부패관리를 정리하면서 각급관리들은 스스로 위험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정상적인 국가경영에도 영향을 주었다. 홍무제(명태조)기간동안 여러차례의 숙청이 있었는데, 관련된 사람만 십수만명이었다. 신흥귀족세력에 대하여 위협적이었을 뿐아니라, 공신을 죽이는데 있어서 역사상 제1인자라는 욕도 얻어먹었다. 그는 한나라초기의 분봉제도를 회복하고 고급중앙관료의 권한집중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동성 왕후들의 권력이 너무 커져서 꼬리가 머리보다 커지는 현상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가 지명한 중앙정부의 후계자가 결국은 지방제후에게 밀려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권력을 가진 신하의 출현을 막기 위하여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나중에 황제의 무능으로 권력은 환관에게 넘어간다. 이것은 명황조가 망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는 특무정치를 실시했고, 특무정치를 제도화하였다. 각급관리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동시에 환관에게 권한이 집중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각급 관리들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군사적으로, 그는 문관이 무장을 견제하는 정책을 썼다. 등급으로 보면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억제했다. 문관으로 하여금 군대를 장악하게 하였다. 편제상으로, 병부와 오급의 도독부를 두었다. 병부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나 병사는 하나도 거느리지 않고, 후자는 천군만마를 훈련시키나, 병사 한명도 움직일 권한을 갖지 못하였다. 이런 방식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투에는 불리하였다. 명나라가 북방의 소수민족과 동쪽의 왜구의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일정한 정도에서 무장이 스스로 잘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문인들은 군사를 잘 몰랐다. 명나라의 저명한 장수들을 보면, 끝이 좋았던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주원장은 농상(農桑)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썼다. 전란의 폐해를 입은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강제로 인구를 이주시켰으므로, 일부 농민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문화적으로 그는 과거제를 채택했다. 일부 지식분자들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문자옥(文字獄, 글을 쓴 것을 트집잡는 사건들)을 많이 일으켰고, 이것은 아주 나쁜 독재정치로의 길을 열었다. 명청 양대에 문화독재의 창시자였다.

 

전체적으로, 주원장은 중국에서 몇 되지 않는 업적이 있는 황제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좋게 평가하기도 하고, 나쁘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나 도착점은 모두 봉건황제라는 점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추화'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런 '추화'는 조상들에 대하여 가장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민족역사에 대하여 가장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스스로 자신의 조상을 욕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