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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원장)

주원장이 개국공신들을 미친듯이 살해한 이유

by 중은우시 2006. 9. 15.

중국역사를 들추어보면, 매번 왕조가 바뀔 때마다 시체가 산을 이루거나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천하를 얻은 제왕은 권력을 얻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권력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의 신경질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러, 누가 또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을지를 눈에 불을 켜고 살펴봤다. 그래서 왕왕 천하를 놓고 다툴만한 공신들에 대하여는 독수를 펼치게 되었다. 한고조 유방, 수문제 양견도 공신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 죽이지는 않았다. 조광윤은 공신들의 권한을 내놓게 하고 편히 말년을 보내게 해주었으니, 비교적 인자한 편이었다. 이 측면에서는 명태조 주원장이 가장 심했다. 주원장이 공신들을 죽인 것은 대체로 3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 황제와 재상의 권력다툼.

 

중국의 군상쟁권(君相爭權, 임금과 재상의 권력다툼)은 유래가 길다. 진시황이전에 재상은 상국(相國)이라고 불렀고, 당, 정, 군, 사법의 모든 권력을 통할했으며, 일체의 국가대사는 상국이 결정했다. 엄연한 작은 황제였다. 주무왕시절의 강자아, 진시황 초기의 여불위는 일찌기 이 직위를 맡았었고, 주무왕이나 진시황마저도 상보(尙父), 중보(仲父)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들이 존경받는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촉에서 후주 유선도 제갈량에 대하여 상보(相父)라고 불렀으니, 고대의 풍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진시황은 상국의 권력이 너무 크다는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군, 정, 사법대권이 상국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을 타파했고, 권력을 셋으로 나누어 태위(太尉), 재상(宰相), 어사(御史)에게 각각 군사, 정무 및 사법을 맡겼고, 직접 황제의 명을 듣도록 하였다. 비록 이렇게 하기는 했어도, 명나라 초기에 재상의 권력은 여전히 컸다. 주원장은 이 점에 대하여 계속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1) 국가가 막 성립되고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고, (2) 관례가 그러하였고, 갑자기 없애버릴 이유는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재상을 바꿈으로써 재상의 권력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일단 재상의 약간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면 파면하거나 죽여버렸는데,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명나라 초에 재상을 맡은 네 사람, 이선장(李善長), 서달(徐達), 왕광양(汪廣洋), 호유용(胡惟庸)은 모두 끝이 좋지 않았다. 서달은 전설에 의하면 주원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왕광양은 직위에서 쫓겨난 후 죽임을 당했고, 호유용은 모반, 부패혐의, 왜구결탁등의 대역무도한 죄명으로 멸족을 당하였으며, 이선장의 전 집안도 가산몰수와 참형을 받았다. 그리고 호유용당파를 추적하여 많은 공신을 포함한 수만명을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이로써 절대적인 권력집중체제를 완성한다. 그리고는 재상의 직위를 더 이상 두지 않았다. 그리고 재상의 권력을 6부로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고, 군대는 5군으로 나누어 5통령은 모두 주원장에게 직접 감독을 받았다. 과거 재상의 직위로 볼 수 있는 대학사는 실제적으로 황제의 고급비서에 불과했다.

 

둘째, 부패척결

 

주원장은 관리의 부패에 대하여 엄격했다. 관리의 부패관련금액이 20냥이상이면 죽여버렸다. 60냥이면 껍질을 벗겼다. 각 지역에는 전문적으로 사람껍질을 벗기는 곳을 두고, 벗녀낸 껍질을 가지고 풀을 안에 넣은 후에 길가에 세워둠으로써 다른 관리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주원장은 탐관오리에 대하여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무대신을 죽일 때에는 풀을 베어버리는 것처럼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사위인 구양륜도 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역대 황제중 가장 대단했다. 이것은 주원장의 출신이 가난하고 천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친히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보아왔고, 양민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보아왔고, 백성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것도 보았고, 백성들이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반란을 일으키는 현실을 직접 보았고,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빠여 반란을 일으킨 경력이 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가 황제가 된 후에 관료의 풍기를 다스리는데에 매우 엄격했다. 그는 "예전에 짐이 민간에 있을 때, 주현의 관리들이 백성들의 어려움은 보살피지 않고, 재물을 챙기고 호색하며, 술을 마시고 일은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의 고통은 본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매우 큰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법을 만들었으니, 탐관오리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탐관오리는 다 죽여버리자"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대명률>>에는 심지어 이렇게 규정하였다. "백성은 단계를 넘어 바로 수도로 와서 지방관리들의 탐장왕법(재물을 탐하고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나 기타 죄행을 고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탐관오리는 수도로 불러서 처리하였다. 탐관오리를 처벌하는데에는 많은 공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주원장이 공신을 없애려는 기존방침과도 관련이 있고, 공신들이 스스로 오만함에 빠져 법을 무시하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공인안(도장이 없어진 사건)" 하나, 곽항사건 하나 만으로도 수만명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셋째는 후계자를 위한 장애제거

 

주원장의 즉위초기에는 몸이 강건했고, 공신들과의 모순도 크지 않았다. 또한 황후인 마씨도 후덕했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하여 그 때에는 공신을 죽이더라도 후기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물론 요영충등과 같은 공신들은 그다지 크지 않은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유기(유백온)도 핍박을 받아 떠났고, 서달이 죽임을 당한 것도 그 예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신들이 법을 어긴 사건은 증가하였다. 주원장과 공신들과의 마찰도 더 많아졌다. 특히 자기의 큰아들인 주표가 유약하고 어려서 죽음에 따라, 장손인 주윤문은 나이가 어려서, 주원장은 후계자인 장손이 공로가 혁혁한 공신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겁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는데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고, 공신들을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대장군 양국공인 남옥은 일생을 전장터에서 보냈고, 공로가 현저하였다. 주원장은 일찌기 그를 한나라때의 위청과 당나라때의 이정에 비교한 바 있다. 그러나 남옥의 오만함은 마침내 주원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 모반의 죄명을 씌워서 그를 죽여버린다. 이 남옥사건 하나만으로도 장국과 조정대신 거의 10만명이 죽임을 당한다. 군대내의 장수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연왕 주체가 남경으로 진공하였을 때, 군대에는 병사를 이끌 장수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개국공신들중에서 단지 서달, 상우춘, 이문충, 탕화, 등유, 목영의 여섯명만이 병으로 죽었고, 공신의 지위를 보전했으며 죽은 후에도 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서달, 상우춘, 이문충, 등유의 네 사람은 모두 호유용 사건, 남옥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다. 만일 그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목숨을 보전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목영은 운남을 지키기위해 남아 있었으므로 외부에 있어서 아무 일이 없었고, 무사히 천수를 다하였다. 탕화는 가장 늦게 죽었는데, 그는 아주 총명했다. 태조 주원장이 공신들을 의심하고 꺼리는 것을 보고는 바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대며 고향으로 돌아갔고, 절대 국가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70세까지 아무 일없이 살 수 있었고, 천수를 다하였다. 물론, 전설에 의하면 서달과 이문충도 모두 주원장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에는 그러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