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상군(湘軍)이 천경(天京, 현재의 남경)을 함락시킨 후, 모두 불태워버리고, 부녀자를 간음하고, 이것저것 모두 약탈했으며, 전 남경성을 3일간 노략했다. 땅 위에 있는 재물은 모두 거둬갔다고 볼 수 있다. "수년동안 중국과 외국에 홍수전의 부는 금과 은이 바다와 같고, 백가지 재물이 가득차있다"고 하였으며, 더 많은 보물을 지하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증국전(曾國荃, 증국번의 동생)은 이수성(李秀成)을 엄히 문초했고, 증국번(曾國藩, 상군의 지도자)도 막료를 보내서 이수성을 심문했다. 심문한 것중의 한가지는 "성안의 땅굴속의 금은을 몇군데 지적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있다. 이수성은 자술서에서 증국번에게 답변했는데, 그의 자술서에는 매우 교모하고 완곡하게 쓰면서 결론적으로 "국고에는 금, 은, 쌀이 없고" "집안에도 금, 은이 없다"고 쓰면서 증국번의 추궁을 막았다.
남경이 함락될 때, 남경성의 구호는 "반조각의 헤어진 베(布)라고 남겨서 요괴(당시 태평군이 청나라군대를 능멸하여 부르던 말)들이 쓰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군은 여전히 당시에 전해지는 바와 같이 천경에는 금과 은이 바다처럼 많을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있었고, 성이 함락된 후, 상군은 도처에서 땅을 팠다. 바로 증국번이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공공연히 "금을 묻은 장소를 발굴한다"고 썼다. 그 후에 남경의 민간에는 태평천국의 지하금고가 있다는 소문이 여전히 있었다. 장로와 왕두부가 부자가 된 이야기들이 그런 것들이다. 신해혁명이후에 어떤 군벌은 태평천국의 지하금고를 발굴해서 부자가 되었다. 여러가지 현상으로 볼 때, 천경성에는 지하금고가 있었던 것같다. 태평천국은 남경에서 10년을 있었는데, 계속하여 홍수전이 지하창고를 만들어 금, 은, 재물을 숨겼다는 전설이 돌았다. 남경성을 공격하던 상군은 이 전설을 그대로 믿었다. 성을 함락시킬 때, 상군은 사방에서 지하창고를 발굴하기 위해 땅을 팠고, 증국번은 일찌기 공고를 내서 "적의 지하금고를 발굴한 자는 관청에 보고하라, 어기는 자는 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바 있다. 상군이 성에 들어온 후 증구(曾九, 증국전이 아홉째 동생이므로 증구라고 불렀다)는 지하금고의 전설을 듣는다. 그의 부대는 먼저 천왕부에 들어갔고, 소문에 의하면 증국전은 홍수전의 지하금고의 보물을 캐서 자기가 챙겼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천조궁전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청나라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전의 지하금고에는 비취서과가 있는데, 이것은 원명원에서 나온 것이고, 위에는 갈라진 흔적이 있고, 검은 반점이 있으며 붉은 색을 띄고 있고, 선명하고 매끄러웠으며 모두 천연적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보배는 나중에 증국전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태평천국은 잔혹한 전투를 위하여, 모든 공사재산을 모아서 "성고(聖庫, 즉, 국고)에 쌓아두었고,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은 성고에서 통일적으로 배급하였다. 백성들이 금1냥 또는 은5냥이상을 사사로이 숨기고 있으면 바로 사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태평천국의 재부를 중앙집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지하창고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성고" 제도는 태평천국후기에 "천경사변"이 있은 후에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수성이 형을 받기 전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 때 비록 성고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홍수전의 사금고였고, 태평천국의 공금고는 아니었다. 홍수전과 양수정은 형벌과 법으로써 각 곳의 금,은,쌀을 긁어모았다" 이것은 천경사변후에는 태평천국의 정권은 홍씨 적계들이 장악하고, 성고의 재부는 이미 홍수전의 사금고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전이 천경에 들어온 후에는 군중과 유리되어 깊은 궁궐에서 살면서 10년간 바깥을 나오지 않았으며, 그의 직접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천왕부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성의 왕들에 대하여 의심이 많았었다. 천왕부는 그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안전감을 느끼는 곳이었으며, 만일 지하금고가 있었다면 바로 천조궁전지하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홍수전이 천조궁전을 만들 때, 전국의 모든 재산을 들이부었고, 각지의 보물을 뺏어와서 궁내에 두었다. 다른 왕부들도 각각 금고를 두었다. <<송호수필>>의 기재에 따르면 "남경성의 4개의 왕부 및 지하금고는 모두 이미 수색하여 약탈해서 비어버렸다" 비록 천조궁전의 지하금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증국번도 동치제에 대한 보고에서 천왕부의 지하금고에 대한 일을 부인하였다. 그가 조정에 보고할 때에는 2매의 "옥새"와 1매의 "금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재에 의하면 "증국번의 태부인은 3월초에 금릉에서 호남으로 돌아왔는데, 호송하는 배가 약 210개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옮겼을 까? 금은재보였을까 아니면 다른 중요한 물건이었을까.
당시 상군이 천왕구를 수색한 것은 매우 세심하게 하였다. 심지어 비밀리에 천왕부내에 묻혀졌던 홍수전의 사체까지도 발굴해내었고, 시체를 태웠을 정도이다. 지하금고는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사실 천왕부는 전부 불태워진 것은 아니었고, 적지않은 건물이 남아 있었다. 핵심건물인 금룡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백년동안 아무도 그 지하를 조사한 적은 없다. 금룡전의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천조궁전의 지하에는 금을 감추고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진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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