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중국은 5000년의 문명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두 5천년의 문명사를 얘기하지만, 이 5천년이 어떻게 계산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만일 최초로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 상나라부터 시작한다면 3,500년이다. 거기에 전설중의 하(夏)왕조까지 합치면 4000년이다. 5천년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삼황오제의 시대를 다 계산해 넣은 것같다. 즉, 중국의 문명은 바로 "반사반인(半蛇半人, 반은 뱀이고 반은 사람인)"인 복희(伏羲)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여와(女와), 반고(盤古)는 안집어넣는 것인지? 여와는 백색인종은 만든 적이 없어나, 그녀는 적어도 동아시아인임에 분명하고, 중국의 조상으로 하더라도 아주 합리적일 것인데....
9. 사대발명은 고대중국과학기술이 세계를 이끈 표지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많은 세계의 선진적인 발명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오직 4대발명이 주로 중국인의 세계의 과학기술진보에 대한 공헌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종이를 만든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발명이 사회진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기 힘들다. 화약은 폭죽을 만드는데 썼고, 나침반은 풍수를 보는데 썼으며, 인쇄술은 불경을 인쇄하는데 썼다. 이것이 바로 사대발명으로 중국이 한 공헌이다. 당연히 중국이 이 기술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잘 쓰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국사료에서 보면 그들도 이들 네가지를 발명한 것으로 나온다, 도대체 누가 더 빠른지는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소위 4대발명품이라는 것들도 주로 서방에서 "개선"된 것이 지금 쓰이고 있고, 그들은 이미 중국의 선조들이 발명한 제품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4대발명품의 발명권은 중국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중국에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서방의 최후성공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4대발명은 동서양의 공동의 재산이지, 누구도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 구미식민자들은 구중국이 낙후한 원흉이다.
중국이 세계를 앞서가다가 낙후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아편전쟁의 실패이다. 이것은 소위 반봉건반식민지시대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원명원방화와 팔국연합군은 북경을 그들 집의 정원정도로 보았던 것이고,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다. 중국의 빈곤하고 낙후된 것은 중국자신에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서방국가도 절반의 "공로"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에 유익한 일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국에 한 유익한 일은 해로운 일보다 더 많았다. 19세기의 중국은 봉건왕조가 이미 끝을 나타내고 있었고, 중국의 생산력은 거의 더이상 상승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은 아편전쟁의 실패시까지 이 점을 인식할 수 없었다. 서방사람들이 전면적으로 진입하고, 그 때의 중국인들에게 세계에는 "민주"와 "과학"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천년간 내려온 황제통치가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가져온 변화는 시대를 가르는 것이었고, 중국사회가 더욱 진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당연히 서방인들은 멀리서 온 것은 중국사람들을 가르쳐주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다량의 재물을 뺏어가고, 대량의 배상금을 착취하였다. 이것은 서방인들이 중국사람의 눈에 강도로 비치게 된 큰 이유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단지 표면이다. 서방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사실 상업이익이었고, 가장 바라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이었으며, 등가교환에 의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배상금이나 빼앗아간 것은 순수견양(順手牽羊, 손댄 김에 양을 끌고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돈은 그들이 가져가지도 않았고, 아마도 서태후에 의하여 화원을 건설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서방상품의 진입은 중국의 전통적인 소농경제를 거의 파괴시켰다. 자급자족의 소농경제는 사회의 발전을 제약하는 것이었고, 단지 상품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시장경제만이 중국이 나갈 길이었다. 그러나 서방식민자들이 청정부에 연해항구를 개방하도록 요구한 것은 분명히 중국의 시장경제체제의 건립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종합하여 말하면, 중국이 더 이상 발전하려면 "민주", "과학", "시장경제"의 세가지 요소가 필수적이었는데, 이것은 중국인 자신들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서만 중국인들이 받아들이고 이용하여 자기의 국가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서방인들으 ㅣ침입은 청정부의 이익을 해하였을 뿐아니라, 직접적으로 보통민중의 이익도 해하였다. 대량의 싼 제품, 면세제품의 경쟁력은 토산품의 경쟁력보다 강했고, 그래서 의화단의 난과 같은 것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하려면 진통이 따르는 법이다. 중국이 지금 외국농산품의 진입이 중국자체 농산품에 충격을 줄 것이라는 이유로, WTO를 탈회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서방사람들이 중국에 온 것은 돈을 빼앗기 위한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하는 것, 특히 중국에 강제로 하게 하는 것들은 분명히 나쁜 일일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 좋고 나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에 가져다 주는 영향에 의해서 판단해야지, 그들 자신의 목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중국은 마치 세계의 모든 사람이 백구은(白求恩)처럼, 중국에 오는 것이 중국사람들을 각성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며, 나중에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같다. 서방인들의 전쟁은 우리에게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변혁도 평온하게 진행될 수는 없다. 세계에는 공짜 밥은 없는 법이다. 서방인의 침입은 황제제도의 종결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중국의 국가가 수억냥의 손실을 보더라도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중국은 원래 마음이 넓은 국가가 아닌가? 민족단결을 위하여, 비록 우리의 수천만명을 살해한 야만적인 몽고인, 만주인도 모두 용서하는데, 왜 진정으로 우리에게 진보를 가져다준 서방인들을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
중국은 항상 서방국가는 중국을 멸망시키려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영원히 그들의 식민지로 두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더욱이 중국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그들 서로간의 세력균형때문이었고, 그래서 어느 한 나라가 중국을 독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중국의 독립을 유지시키면서 이익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망국의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들은 중국이 너무 낙후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인의 구매력이 너무 낮으면 그들의 상업이익에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중국역사상 최대의 배상금인 경자배상금은 나중에 각 나라들이 모두 포기하였고, 이전에 얻은 일부분 돈도 모두 중국에 투자하여 교육사업등에 사용하였다. 청화대학의 건립자금은 바로 경자배상금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 가장 취약했던 때는 바로 1917-1925년일 것인데, 이 때는 중국의 군벌이 난립하고, 사분오열되어 있었는데, 서방국가는 중국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30년대에는 서방의 대공황시기인데도 중국에 들어와서 빼앗아가지 않았다. 이 때의 국민정부는 근백년내에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래서, 서방국가가 중국을 압박하여 자본주의를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서방국가는 미국, 영국, 미국, 프랑스등 구미국가를 말하는 것이지 일본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중국은 그들의 이웃이었고, 직접침략에 용이하였다. 그들은 근대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존망에 대하여 위협을 주었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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