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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 10명의 위군자(僞君子)

by 중은우시 2006. 3. 24.

먼저 설명할 것은 10대 위선자의 기준이다.

첫째, 그들은 위선자이지, 큰 악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흉악하게 사람을 도살했던 진시황이나 초패왕 항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은 잘 숨어져 있던 위선자들이므로, 현재까지도 숭상을 받고 있다. 비록 약간의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왕망과 같이 생전에 드러난 경우는 비록 위군자이기는 하지만, 포함되지 않는다.

 

시대순서에 따라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순(舜)

 

순은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그의 부친은 맹인 악사였다. 아들을 알려면 그 부친을 보라는 말이 있다. 눈이 먼 이 늙은 음악가는 자기 아들의 속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서, 몇 차례에 걸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두 순이 도망쳐 버렸다. 나중에 순이 요(堯)의 신뢰를 받아 관직이 높아지고, 대권을 장악한 후에는 요의 아들인 단주(丹朱)를 죽여버리고, 요는 연금시켜버렸으며, 요를 압박하여 '선양'하도록 하였다. 이외에 요의 두 딸을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선양'을 받은 인물이다. 조비가 한헌제의 두 딸을 취하고, 한헌제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한 후에 득의양양하게 말한 바 있다. "이제서애 고대의 선양이 어떤 것일지를 알았다".

 

2. 이윤(伊尹)

 

이윤은 탕(湯)의 재상이다. 탕이 죽은 후에 탕의 아들인 태갑(太甲)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태갑에게 여러가지 죄명을 씌우고 태갑을 동궁에 가두어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3년후에, 태갑이 자기에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으로 빠져나간 후에, 다시 돌아와 이윤을 죽였다. 나중에 이윤의 이미지는 미화되어, 권력을 장악한 대신들은 모두 이윤의 예를 따르고자 하였고, 그들이 싫어하는 황제를 폐위시키고자 하였다. 나중에 스스로 이윤의 운명을 따른 사람들은 결국 황제와 너죽고 나살기식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곽광(사후 전 가족이 몰살됨), 동탁(피살됨), 손준(나중에 전가족이 몰살됨), 사마소(사후에 아들이 권력을 찬탈함)....

 

3. 유비(劉備)

 

사람들이 여포가 세 사람을 모셨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종종 유비에 대하여는 잊고 있다. 유비는 먼저 유언(劉焉)을 모시다가, 나중에 공손찬(公孫璨)을 모셨다. 도겸(陶謙)이 그에게 약간의 군대를 주자 그는 다시 도겸에게 투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은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죽었고, 두 아들도 비명에 갔다. 유비는 서주에서 얼마지나지 않아 여포에게 빼앗겨버린다. 그러자 얼굴두껍게 다시 여포의 문하에 투신한다. 그러나 여포는 계속 그를 신임하지 않았고, 유비는 다시 조조를 쫓아 여포를 멸하게 된다. 그러나 경성에 도착하자 그는 다시 조조에게 독수를 쓰고자 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실패한 후에는 원소(袁紹)에게 투신한다. 원소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유표(劉表)에게 투신한다. 유표가 죽은 후, 아들 하나가 조조에 투항하고, 다른 아들 하나는 유비의 손에 있었다. 젊어서 주색에 빠져 죽고 만다. 주유가 조인을 형주에서 격파하였을 때, 유비는 얼굴두껍게 형주를 빌린 후에 계속 돌려주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결렬된다. 유비의 최후의 배반은 옛 상사인 유언의 아들인 유장(劉璋)에 대한 것이다. 삼국연의에서는 그가 동종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헛소리이고, 그가 엄청나게 원했던 것이다.

 

4. 제갈량(諸葛亮)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에 원래 익주의 대신인 이엄 등의 사람을 배척하고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는 어조로 후주 유선에게 말하곤 하였다. 궁중과 부중은 모두 일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결국 유선이 제갈량의 말을 잘 듣는다는 의미였다. 아쉽게도 제갈량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아들이 아직 너무 어렸다. 그래서 황위를 빼앗는데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남제갈, 북사마. 그들의 방식은 비슷했다.

 

5. 이세민(李世民)

 

이 일대의 명군은 성을 살륙한 기록이 있고, 형제를 살해한 기록이 있으며, 부친을 납치한 경력이 있고, 황제위를 찬탈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동생의 처를 궁중에 불러들여 자기의 비로 삼았으며, 완전히 잔인, 호색, 살인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쇼를 잘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형제를 죽인 후에 당고조의 유두를 빨며 크게 소리쳐서 울었다는 사실은 역겹기까지 하다. 그는 역사를 고쳐썼을 뿐아니라, 고의로 역사서에 일련의 이야기들을 남겨놓았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역사의 기록에 대하여 물어볼 권리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당태종은 일찌기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금단(不老金丹)의 미신을 믿었다고 조롱한 바 있는데, 마지막에는 자신도 금단중독에 의하여 죽는다.

 

6. 조구(趙構)

 

사람들이 대대로 진회(秦檜)를 욕하면서, 진회는 단지 방조범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황제의 명이 없었다면 어디에 12도금패가 있을 것이며, 황제의 묵인이 없었다면, 진회가 어찌 부재상의 지위에 상당하는 대장군에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죄목을 붙여 억울하게 죽게 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진회등의 사람들은 속죄양이 되어 영원히 악비의 묘 앞에 무릎꿇고 있게 만들었는데, 송고종 조구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있다.

 

7. 주희(朱熹)

 

주자는 정주이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없애자"고 주장하였다. 도덕적으로 매우 가혹하게 요구하였고, 드는 또 정이천이 "굶어죽은 것은 적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라"는 이론을 내세워 친구의 동생에게 수절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자기는 오히려 수절하던 동생의 처를 억지로 개가시켜서 동생의 재산을 가로챈 일이 있다. 이외에 주희는 자기의 관점에 반대하는 당중우(唐仲友)를 치기 위하여, 엄예(嚴蘂)라는 기녀에게 혹형을 가하여 당중우와 남여관계가 있다는 것을 실토하게 하려하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엄예가 끝까지 협력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볼 때, 이 도덕가의 사상의 경지는 일개 기녀만 못하였다.

 

8. 해서(海瑞)

 

해서에게는 딸이 있었다. 7살 때, 다른 사람의 전병을 훔쳐먹은 일로 인하여, 해서는 그를 굶어죽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어린 아이가 자살하였을리는 없고, 실제로는 굶어죽은 것이다.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이아(易牙)는 제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끓여서 그에게 먹게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잔인함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영화부귀를 위하여는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는 것이니 절대 믿지 말라" 비교하자면, 해서는 자기의 청렴한 관리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7살된 딸을 굶어죽게 한 것인데, 사실 그것의 본질은 이아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9. 건륭(乾隆)

 

건륭제 홍력은 문화의 파괴자였다. 그러나 그는 진시황처럼 분서갱유를 하지도 않고, 피를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크게 작은 학문을 제창하고, 유학자들로 하여금 경전을 연구하게 하며, 세상 일에는 관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사고전서를 편찬하여 대량의 진본 고본을 구하여서, 마음대로 고치고, 원저를 훼손하였으며, 많은 글자들이 고쳐져서 원래의 모양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여진인이나 만주인의 지방에 관련되는 것은 "노(虜, 오랑캐), 달"과 같은 글자들까지도 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이외에 건륭은 또 하나의 취미가 있었는데, 그가 감상한 고서화에는 8촌크기의 네모난 건륭어상(乾隆御賞)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어떤 그림은 폭이 1척에 불과한데도, 무조건 다 찍었고, 많은 좋은 그림들이 도장으로 인하여 제 면목을 잃어버렸다.

 

10. 홍수전(洪秀全)

 

하나의 과거에 낙방한 서생이, 몸을 일으켜 사교의 총두목이 되었고, 정교일치의 할거정권을 수립하였고, 기독교의 교의를 바꾸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을 벌였다. 원래 그가 죽으면서 나라도 망하였는데, 이미 그의 인간천당의 신화는 파탄났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용되었고, 그를 농민의 대변인, 민족영웅인처럼 분장시켰다.  그래서, 이 자도 진면목을 들춰내야 하는 사람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