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위 : 명효종(明孝宗) - 장황후(張皇后)
명효종과 장황후가 1위에 꼽힌 것은 일부일처(一夫一妻)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 일부일처, 즉, 황후이외에 다른 후궁을 전혀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을 황후하나만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자손이 많아야 하고, 특히 황실의 자손이 많아야 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자주 후궁을 더 두도록 요청하였는데도 일부일처를 유지해냈다. 이들 부분에게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명무종(명무종) 주후조이다.
제2위 : 수문제(隋文帝) - 독고황후(獨高皇后)
이들도 명효종 - 장황후처럼 1부1처를 해냈다. 그러나, 2위에 머문 것은 수문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고 명효종처럼 스스로 원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독고황후가 무서운 여자였다. 수문제는 일찌기 궁녀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는데, 독고황후는 그 궁녀를 죽여버렸다. 이에 수문제는 크게 화를 내며 후궁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신들도 그가 독고황후를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또한 둘 사이의 자식들이 이미 커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후궁을 두겠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3위 : 한선제(漢宣帝) - 허황후(許皇后)
한선제와 허황후의 한쌍은 보기 드물게 빈천하게 살다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한선제의 할아버지는 원래 한무제의 장남이다. 그러나 변란이 나서 자살하였고, 그의 부친도 함께 죽었다. 그래서 한선제는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평민의 신분으로 자랐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평민인 허평군(許平君)과 결혼했다.
그런데, 한소제가 죽은 후, 창읍왕도 27일간 황제를 하다가 쫓겨났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곽광은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평민중에서 뽑기로 하고, 한선제는 일약 황제로 등극한다. 곽광은 한선제를 황제로 올리면서 허평균을 버리고 자기의 딸과 결혼할 것을 요청하지만 한선제는 거절하고 허평군을 황후로 삼는다. 뿐만아니라, 허황후가 죽고난 후,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을 고려하여, 후궁중에서 자식이 없는 여자(한선제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이므로 자식이 없을 것임)를 골라 황후로 삼아 아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제4위 : 명태조(明太祖) - 마황후(馬皇后)
명태조 주원장은 마황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었다는 점은 의문이 없다. 첫째는 마황후가 먼저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후에 명태조는 아무도 황후로 세우지 않는다. 이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마음 속에 마황후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명태조는 매우 잔폭한 사람이었고, 자기 주위의 여자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후궁도 조금의 잘못을 저지르면 죽여버렸다. 명태조가 다른 후궁들을 자식을 낳는 외에는 전혀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봐서도 마황후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5위 : 금세종(金世宗) - 오림씨(烏林氏)
금나라때 완안량은 전형적인 무뢰한이었다. 그는 재위기간동안 음행을 일삼았는데, 자기의 친자매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금나라 귀족여성들은 모두 몸을 사렸다. 완안량이 오림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그녀를 궁중으로 부른다. 오림씨는 간다면 반드시 치욕을 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자살한다. 이후 금세종은 정변을 일으켜 완안량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는 오림씨를 기리기 위하여 평생 황후를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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