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nmanqiu라는 중국네티즌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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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중국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중일관계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큰 장애로 되었다. 우리는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민족의식에서 나오는 편견을 버리고 본다면, 우리의 역사에 대한 태도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근대의 곽말약은 역사를 정치에 아부하는 도구로 생각하였다. 억지로 중국역사에 노예사회를 끼워넣었다. 진시황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도 모택동의 호불호에 따라 바꾸었다. 전체의 근대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서구열강이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인민이 이에 반항한 것이다. 도덕적인 정의와 비정의의 투쟁으로 진보와 낙후의 비교를 덮어버렸다. 우리가 본 후에는 분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 아편전쟁의 발생원인은 무엇인가? 영국인은 왜 아편을 팔았는가? 전쟁의 발생은 도대체 어찌하여 일어난 것일까? 이런 점에 대하여 우리는 관방의 역사서적에서는 근본적으로 실제의 진상을 알아낼 수가 없다. 역사는 우민화의 도구가 된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아편전쟁전에, 영국인들은 광주에서 중국인들과 거래를 할 때, 단지 관청의 '공행'과 거래할 수 있었다. 건국후의 국영대외무역수출입회사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무역에 있어서 관세장벽외에 또 하나의 비관세장벽을 쌓아놓은 것이다. 이에서 발생하는 이상한 현상은 다음과 같다. 기술이 발달한 영국이 기술이 낙후한 중국과 거래하는데, 항상 무역역조가 발생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이러한 불공정한 무역환경을 도저히 바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편을 밀수함으로써 무역에서의 적자를 메꾸는 방법이었다. 임칙서가 아편을 금지한 것은 단지 불법적인 아편무역채널을 막으려는 것에만 신경썼지, 영국인들의 무역에 있어서의 합리적인 요구사항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구체적인 조치에서도 너무 극단적으로 갔고, 당시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은 무시되었으며, 이에 따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우리는 임칙서의 애국적인 행위를 통해서, 동시에 그로 대표되는 봉건전제정부의 몰락과 수구성를 보게 된다. 그러나, 역사서적은 대영제국에 대하여 지나치게 비난하고 있고, 임칙서에 대하여는 지나치게 찬미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후의 여러차례의 전쟁과 체결된 불공정조약은 "침략"이라는 간단한 개념으로 처리된다. 사실 서구열강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근본적으로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러시아와 일본은 제외).
단지 하나의 비교적 개방되고 완화된 무역환경을 원했을 뿐이다. 소위 불평등조약의 주요 조항의 핵심문제는 바로 무역조건이었다. 그런데 이런 무역조건 자체는 가혹하다거나 불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활력있고 기백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무역규칙의 도전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런 무역규칙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고, 그들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점진적으로 피동적이고 낙후된 국면을 전환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이 바로 좋은 예이다. 안타까운 점은 중국은 그러한 좋은 정부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피동적으로 하나하나 대응하면서 얻어맞기만 하였다. 안타깝께도 중국의 낙후된 문화의 부담은 이렇게 침중하였던 것이다. 100여년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에 대하여 정확하고 객관적인 인식과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를 곡해하고,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근대에 시작된 것도 아니다. 중국인들의 선조인 공자는 동시에 역사를 곡해한 비조격이다. 그의 "춘추필법", 그의 역사사료에 대한 삭제, 그의 삼황오제 소위 대동지세에 대한 지나친 찬미, 그 목적은 그의 "예"를 핵심으로 하는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역사학에 메꿀 수 없는 손실을 초래했고, 후인들에게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문혁시기는 바로 "춘추필법"이 극도로 발휘된 시기였다. 당시에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임표가 홍군을 이끌고 정강산에서 모주석을 만났다"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어떤 역사를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였겠는가?
그래서, 일본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그다지 잘난 것은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저 잘난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 방면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일본인들이 "같은 글과 같은 인종"이라고 얘기하지 않는가? 나는 그들의 이 방면의 재주를 중국에서 배워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아니면 유전인자가 전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외국인이 쓴 역사서적을 샀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그는 아마도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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