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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청화대학의 유래

by 중은우시 2006. 3. 19.

1900년, 중국의 경자년 의화단의 난은 8국연합군의 무력간섭을 불러왔다. 1901년 9월 7일 오전, 청나라 정부의 전권대표인 혁광과 이홍장은 11국의 대표와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신축조약의 제6조에는 청정부가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8개국 및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노르웨이의 6개 피해국에게 군비, 손실비용등 원본과 이자 합계 982,238,150냥 백은을, 1902년부터 1940년까지 39년으로 나누어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세관과 염정등에서 들어오는 돈을 담보로 제공하였다.

 

1906년 3월 6일, 미국의 전도사 명은부(明恩溥)가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청나라 정부의 '경자배상금'을 중국에서 대학을 만들고, 중국학생들이 미국에 유학오는 것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회에 중국교육을 지원하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1908년 국회를 통과했다.

 

1908년, 미국은 정식으로 경자배상금의 절반 합계 1,160만달러를 반환하여 미국유학생들의 자금지원에 사용하겠다고 선포하였다. 미국유학생파견업무를 전개하기 위하여 청나라 정부는 1911년 북경에 "청화유미예비학교(淸華留美豫備學校)"를 설립하였고, 1924년에 "청화대학"으로 개명하였다.

 

1924년, 미국국회는 나머지 경자배상금도 중국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고, "중국문교촉진기금회(중국기금회)"를 만들었다. 금액은 1,254.5만달러였다. 북양정부는 10명의 중국인과 5명의 미국인으로 위탁관리이사회를 만들었다. 그 중의 상당한 금액은 장학금의 방식으로 청화대학에 제공되었다. 이런 특수한 경비의 원천과 운용방식으로 인하여 청화대학은 창건때로부터 많은 측면에서 자신만의 특수한 우세와 학업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대학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국외의 약사학자는 "청화대학이 성공한 하나의 비결은, 다른 대학들이 군벌정권의 불안정적인 자금시혜에 의지하고 있을 때, 청화의 연도예산은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미국의 작용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중국과학원의 회원중 청화출신이 1/3에 가깝다. 1949년에 청화기금을 관리하던 걸출한 교육가인 매이기(梅貽琦) 선생이 대만으로 간 후에, 다시 이 돈을 이용하여 신죽청화대학을 만들었다.)

 

미국의 교육계획은 효과를 나타냈다. 경자배상금을 받아 미국에 유학한 중국학생들은 나중에 수십년간 중국학술계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되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미국은 이미 일본을 추월하여 중국유학생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동시에, 미국인은 중국에 12개의 교회대학을 설립하였다. 그 중에는 유명한 연경대학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병원으로는 협화의원이 있고, 록펠러기금은 중국학자들의 농촌조사와 고고활동에 자금을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