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갑신년은 역사에 많은 흥망의 법칙을 보여주었다. 중국혁명승리전에, 모택동주석은 전당원들에게 곽말약의 <<갑신삼백년제>>를 공부하도록 얘기했고, 북경으로 들어올 때, "절대 이자성이 되지말자"고 당부했다. 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정당이었고, 그 구성원은 대부분 농민출신이었다.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했을 때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자성은 섬서성북쪽의 대기근때 농민반란을 일으킨 후, 17년간의 전투를 통하여 100만대군이라고 큰 소리치는 군대를 이끌게 된다. 옛날에 병사를 움직일 때는 과장이 많았기는 하다. 그러나 북경을 점령하기 전에 이미 7, 8개의 성을 점령하고, 신변에 십여만의 군대가 있었으며, 각지에 분산된 병사들도 수십만에 이르렀다. 이자성의 구호는 "이자성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반기었다. 그는 섬서에서 파죽지세로 북경까지 이른다. 숭정황제는 아깝지만 자기의 사금고에 들어있는 3,700만냥의 은자를 내서 이미 몇달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 북경방어병사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자 북경의 명나라군사는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버린다. 숭정황제는 경산으로 가서 목을 매고, 몇대에 걸쳐 쌓아두었던 재부는 이자성이 가져가 버린다. 이자성의 부대는 금은이 가득한 것을 보고는 눈이 돌아버린다.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입했을 때는 그들의 최고정점이었고, 심연의 나락으로 내려가는 시작이기도 하였다. 북경에 진입한 때로부터 북경성을 버리고 도망칠 때까지의 42일간은 이자성의 농민군에게는 천양지차를 보인다. 이전의 용맹무쌍했던 병사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버리고, 이자성이 북경에서 패퇴할 때도 각지에는 수십만의 병사들이 있었고, 입관전의 만주팔기군과 오삼계의 군사는 합쳐야 겨우 14만에 불과하였는데도, 이자성의 농민군은 병력을 모아서 맞서지 못하고 그저 재물을 끼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반년후에 청나라군대가 섬서를 공격하자, 이자성은 다시 호북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면서 싸울 때마다 패배하고, 결국은 죽임을 당한다.
이자성의 실패에 대하여, 적지 않은 정치가들과 사학자들은 여러가지 교훈을 얻었다. 관건적인 것은 두가지였다. 북경에 진입한 후에 맹목적인 낙관주의에 빠진 것과 병사들이 재산을 신경쓰면서 부패일로를 걸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올 때 의복이 아직 수수했고,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부패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의리를 중시했고, 북경성내에서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을 그저 두고 보았는데, 이것은 부패한 군대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의 의형제인 유종민은 최대한 끌어들여야할 대상인 오삼계의 집과 첩 진원원을 뺏어버리고, 이미 귀순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향하던 오삼계의 화를 돋구어, 바로 산해관으로 되돌아가 청나라 팔기군과 손을 잡도록 만들어버린다. 농민군의 노략질은 원래 유리하던 국면을 신속히 반전시키게 되고, 자기들이 얻을 수 있었던 힘을 관외의 청나라팔기군에게 주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러면서 농민군의 전투력을 신속히 하락한다.
당시 북경성내의 목격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농민군 병사들은 현지 관리와 부자들을 핍박해서 빼앗은 금은보석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식한 병사들은 사처에서 선생(글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써서는 빼앗은 팔찌, 반지를 편지에 넣어 고향으로 보내고 있었다. 자고이래로 병사를 다루는 도리에서는 몸에 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는 병사들은 절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를 않는 법이다. 이자성은 당연히 이 이치를 알아야 했었다. 북경에 진입한 후 그는 병사들이 재산을 빼앗는 것을 허락한다. 전략적인 안목이 부족하여, 청나라와 명나라 잔존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놓아버린다. 오삼계가 마음을 바꾸어 항복하기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자성은 명을 내려 토벌하고자 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몸에 귀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사람들마다 재산을 충분히 얻었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만 하게 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서게 된다. 이자성이 출정하기 전에 북경에서 수천의 철공을 모아서 금은을 떡모양으로 제련한 후 마차에 실어 서안으로 운송하도록 시킨다. 이것은 이자성 본인도 눈앞의 이익을 탐하였지 천하를 얻으려는 흉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서 패하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이자성은 바로 병사를 정돈한 것이 아니라, 급히 서둘러 자금성으로 들어가 황제에 등극하는 전례를 치른다. 황제에 맛을 들여, 다음날 천안문과 황궁에 불을 지르고 서안을 향하여 떠난다.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한 자가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풍족하게 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얻은 많은 재물과 그의 머리에 걸려있는 현상금은 모든 사람들이 노리는 바가 된다. 이자성이 섬북 미지의 고향에서 행궁을 막 준공하였을 때,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이미 따라왔고, 청나라정부는 도적을 따랐던 관리들이 투항한다면 원래의 직위와 재산을 보류해주겠다고 선포한다. 농민군이 철수할 때 많은 문무고관들이 청에 투항한다. 여기에는 대순정권의 재상 우금성과 군사 송헌책도 포함된다. 후인들은 왜 이자성이 본대에서 이탈하여 겨우 20여기마병을 데리고 호북성 구궁산으로 가서 농촌사람들에게 맞아죽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의 군심을 분석하면, 아마도 그는 부하들과 같이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느꼈을 지 모른다. 역사상 반란자 예를 들어, 진승, 황소등이 모두 패배한 후에 부하들에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자성은 이런 액운을 피하기 위하여 오히려 더욱 방비가 없고, 쉽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이자성의 비극은 사회환경의 각도에서 분석하면, 중국의 구식 농민전쟁의 피할 수 없는 역사철칙에 따른 것이다. 봉건사회중에서 소농은 선진적인 생산략도 가지지 않았고,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봉건왕조에 대하여 반란은 일으킬 수 있었지만, 봉건주의사상의 속박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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