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헌책 (? - 1645)
영성(永城) 사람.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학식이 넓었으며 특히 "술사"로 유명하였으며, 오랬동안 사방을 떠돌아 다니며, 점을 쳐서 길흉화복을 알려주었다.
1641년 4월, 송헌책은 보풍(寶豊)의 선비인 우금성(牛金星)의 추천을 받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에 들어간다. 그는 여러가지 계책을 내고, 재주가 비범하여 이자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매번 전투시마다 반드시 그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의 기문둔갑, 도참등에 학문에 대하여 이자성은 매우 믿었다.
송헌책은 또한 "십팔해아당주신기(十八孩兒當主神器)"라는 참언을 퍼뜨렸는데, 해아는 어린아이라는 뜻이므로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가 황제가 된다는 참언이다.
1641년에 농민군이 남양(南陽)을 칠 때도, 송헌책의 우회전술을 받아들여 명나라 장수 양문악으로부터 남양을 빼앗았다.
1644년 1월에는 서안에서 이자성은 대순정권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는데, 송헌책은 당시 이자성을 도와 관료조직을 완비하고 "개국대군사(開國大軍師)"로 칭해진다. 그해 2월, 이자성은 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쳐들어가는데, 당시 송헌책은 이자성에서 "해아군사해아병, 해아공성관교영, 지소출료해아진, 해아탈취북경성"이라는 참어를 올리고, 이자성은 이에 따라 5000명의 동자병을 뽑아 북경성의 공략에 참전시켜, 성안의 수비병들이 이들의 활약에 놀라 당황하여 결국 북경성을 이자성이 점령하게 된다.
북경성에 진입한 후 우금성, 유종민등이 승리에 도취하여, 유종민이 투항한 관리들에게 혹형을 가하여 재산을 뺏고 있을 때, 송헌책은 다시 이자성에게 진언하여 투항한 관리들을 풀어주게 한다. 오삼계가 청나라군사를 이끌고 북경성을 쳐내려오는 바람에 농민군은 결국 실패한다. 이자성의 사후에 송헌책, 유종민등은 끝까지 항전하다 호북 구궁산에서 송헌책은 청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혀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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