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전(劉典)
세수(稅收)는 국가의 운영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경제적인 보장책이다. 세수라는 말을 둘러싸고, 여러해동안 너무나 많은 희비극이 벌어졌다. 오늘날의 우리가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역사상 이런 황제도 있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고, 세수가 없는 왕조를 만들었다. 그 황제는 우리의 귀에 익은 인물이다. 바로 명나라의 통치를 전복시킨 대순황제 - '틈왕(闖王)' 이자성이다.
이자성은 명나라말기 가장 유명한 농민군의 우두머리이다. 당시 이런 동요가 널리 유행했다: "소뫄 말을 잡고, 술을 준비해서, 성문을 열고 틈왕을 맞이하자. 틈왕이 오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 노래는 이자성이 천하를 석권한 요체를 잘 설명해준다.
이자성이 '무세(無稅)'방침을 정한 데에는 당시 복잡한 역사와 사회적인 요소가 영향을 주었다.
이자성은 명나라말기에 태어난다. 명나라조정은 가정제이래로, 세금부담이 점점 무거워졌다. 나중에 숭정제때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 명목으로는 요동의 청나라군대를 막는데 쓰는 것도 있고, 농민의 난을 진압하는 것도 있고, 신병을 훈련시키는 것도 있다. 토지에 대하여 "요향(遼餉)", "초향(剿餉)", "연향(練餉)"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삼향가파(三餉加派)"이다. 모두 합쳐서 세금을 1670만냥을 늘인다. 이는 통상적인 세금의 배나 된다. 그리고 당시 전국은 기후가 악화되고, 천재지변이 계속되었다. 양식은 매년 거두는 것이 적어졌다. 여기에 지방관리들이 사적으로 몰래 거두는 것도 있고, 사전에 미리 받는 것도 있고, 번잡하고 많은 노역도 있었다. 농민들이 그 부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가난한 농민출신의 이자성은 이에 대하여 느낀 바가 많았다. 그리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어가는데 대하여는 극히 미워하였다.
나중에 농민군의 우두머리가 된 후, 그는 보통사람들의 질박한 요구사항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리하여, 우금성(牛金星)과 이암(李巖)의 건의를 받아, 아주 매혹적이고 충격적인 전투구호를 내놓는다: "균전면량(均田免糧)"
소위 "균전"은 지주귀족의 토지를 빼앗아서 농민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소위 "면량"은 농민군의 주둔지에서는 여하한 세금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한 이 구호가 농민들의 절박한 바램에 부합했다. 그리하여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균전면량"의 깃발을 내걸고, 이자성은 그의 가난뱅이군대를 이끌고, 1643년에 서안을 점열하고, 다음 해에는 황포가신하여 황제에 오른다. 곧이어 농민군은 "삼년면징(三年免徵), 일민불살(一民不殺)", "평매평매(平買平賣)"의 구호를 높이 부르짖는다. 각지의 민중은 "소뫄 말을 잡고, 술을 준비해서, 성문을 열고 틈왕을 맞이하자. 틈왕이 오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환호하면서 당당하게 북경으로 진군한다.
이자성은 '무세왕조'의 구호를 내걸고 급격히 발전한다. 일거에 명나라의 통치기반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정권건립이후, 농민군은 수천명에서 백만명까지 늘어난다. 군대릉 유지하는데는 돈이 필요하다. 장병들에게 상을 내리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정권운영에도 돈이 필요하다. 이런 돈을 일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자성은 여기에 대하여 유명한 "추장조향(追贓助餉, 더러운 돈을 추징하여 군자금에 보탠다)" 정책을 내놓는다. 이 정책의 핵심내용은 바로 "살부제빈(殺富濟貧, 부자를 죽여서 가난뱅이를 구제한다)"이다. 즉 관청, 부자, 귀족의 양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군자금과 정권비용을 조달했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어느 곳으로 가면, 그곳의 고관대작들은 망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낙양의 전투였다. 낙양을 함락시킨 후, 관청, 황친, 훈척, 부호등의 가산을 몰수하여 군인들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낙양성에서 복왕의 저택과 부자들의 쌀창고에서 수십만석을 몰수한다. 옷감과 다른 물건은 무수히 많았다. 그중 약 10%를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모두 군자금으로 쓴다.
서안에서 건국한 후, 다시 명진왕 주존구의 자산 수백만을 몰수한다. 그 후에 관료,귀족이 탐한 재물을 내놓게 하여 군자금으로 쓴다.
북경을 점령한 후, 국가정권운영을 위하여 첫째, 정부창고, 황궁, 종실, 훈척, 태감등의 재산으 몰수한다. 둘째, 북경 및 대순관할구역에서 "추장조향"을 시행한다. '추장조향'의 순조로운 집행을 위하여, 이자성은 '호정부(戶政府)'의 아래에 "최향사(摧餉司)"를 두어 추장조향을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 "형정부(刑政府)"의 아래에 "차향진무사(此餉鎭撫司)를 두어 형벌로 추궁하게 돕는다.
이를 보면, 이자성의 농민군은 가래와 같다. 전체 사회의 상층부를 가래로 한번 긁어버렸다. 고관대작들의 울음소리가 온천지가 가득했고, 중과세에서 벗어난 일반백성들은 환호작약했다.
그러나, 토호, 부자,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정책은 큰 후환을 남기게 된다. 이들은 모두 채소밭의 미나리가 아니다. 잘라버리고 나면 다시 나질 않는다. 한번 자르면 뿌리가 없어지므로 다시 자라지를 않는다. 대명왕조로부터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경제'는 그다지 오랫동안 지속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더 이상 빼앗을 곳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아서 생존하는 것은 장기적인 전략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북경을 점령한 후에 더욱 심했다. 비록 많은 돈을 빼앗았지만, 지나친 추향활동으로, 국가재정의 부족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투쟁의 창끝을 모든 관료귀족지주로 향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적이 너무 많았다.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이 가니, 사회가 불안해진다.
그리고 지나치게 과격한 징세행위는 사회갈등을 가속화했다. 이자성 본인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정조치도 내놓지 않았다.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에 보인 행동은 두 마디로 개괄된다: 농민이 도시로 들어갔다. 시골부자가 서울로 들어갔다.
성을 함락시킨 후, 대순군은 바로 돈을 긁어모은데 집중했다. 반달만에, 약탈한 돈이 7000만냥을 넘어선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중 개인적으로 착복하여 통계를 잡을 수 없는 부분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명나라의 정상적인 세입의 5배에 해당한다. 대순군은 칼을 너무 빨리 휘둘렀다. 대순군은 손속이 너무 매웠다. 큰 돌로 물을 친 것처럼, 사상유례없는 약탈은 여러 곳에서 격렬한 불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일련의 간접효과가 나타난다. 약탈을 하게 되면, 당연히 욕을 먹게 된다. 그 욕설은 이를 악무는 것이고,원한을 복수로 갚겠다는 것이고, 뼛속에 새기는 것이다.
7000여만냥 은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팠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대명의 정계요인, 권력귀족, 부호상인, 호족들이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을까? 이 낙차는 너무 컸다. 아무도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부유계층을 완전히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다보니 사회혼란이 생기고, 인심이 흔들린다. 이렇게 되니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꼴이 되고, 스스로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자성도 뭔가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을 느끼고 저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장병들이 따르지를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자성도 탄식을 한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농민군이 북경에 들어간 후, 장군부터 사병까지 모두 자신의 뱃속을 채운다. 많은 자는 백은 수천냥을 챙기고 적은 자는 수백냥을 챙겼다. 그리하여 모두 부자가 되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 이상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금은보화를 이자성도 밤낮으로 말을 달리게 하여 서안으로 운송한다. 완전히 재물을 목숨처럼 여기는 수전노의 행동과 말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산해관에서 패배하고, 청군이 추격을 받으면서 북경을 떠난다. 백성들은 이미 그들을 뼛속까지 미워했다. 백성들은 상,탁자들을 골목입구에 쌓아놓거나, 혹은 작은 골목에서 때려서 말에서 떨어지면 바로 죽여버리곤 했다.
이자성이 북경을 떠나 서안으로 간 후, '추장조향"을 전면금지시킨다. 이를 통하여 후방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나중에 토지면적에 따라 세금을 차례로 거두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청나라의 팔기군이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하는 것이다. 농민군은 사기가 꺾여 결국 참패하고 만다.
"균전면량"의 정책에 마비되고 가리워져서 농민군의 세금체제는 오랫동안 진공상태로 남는다. 그리하여 군수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여러운 백성을 도와줄 힘이 없었다. 이자성은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금성을 점령한 후, 대순이 무엇을 가지고 살아야할지를. 세금을 받지 않는 조정은 기반이 없는 단명조정이 될 수밖에 없다. 설마 이렇게 큰 국가체제제와 그렇게 많은 문관무신들이 그저 서북풍만 마시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자성의 약점이었다.
만일 숭정제는 지나친 과세로 망했다고 한다면, 이자성은 면세로 망했다. 서로 극단을 가는 세수정책이었고 결국 대명과 대순은 똑같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이자성은 꿈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명사종과 동귀어진할 줄은.
이것은 '성공도 무세때문이고, 실패도 무세때문이다"라는 비극이다.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양날이 칼이다. 이자성을 만들었지만, 이자성을 죽이기도 했다. 식견있는 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자성의 농민군은 그 기세가 대단했지만,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았다.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이자성은 자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 세금과 재정제도는 정권이 건강하게 발전하는 보장이다. 특히 군대에 있어서, 제도화된 군수공급이 아주 중요하다. 병마가 움직이기 전에 양초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만일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군기가 느슨하고, 도덕윤리가 엄격하지 않으면, 쉽게 백성을 괴롭히고, 백성의 재물을 뺏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면 군대외 민중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인심이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사의 교휸이 이렇게 있는데도, 역사의 유감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로서는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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