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화유산(中華遺産)
1644년은 역사상 갑신(甲申)년이다. 이 해에 북경성에는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3월에서 5월 사이에, 주마등처럼 세 개의 정권이 교체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월 19일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은 농민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와 대순(大順)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겨우 40여일을 머물다가 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북경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틈왕 이자성과 그의 정권은 북경에 머물던 이 기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 것일까? 그들은 왜 그렇게 했던가? 무슨 이유로 대순정권이 북경의 정치무대에서 총총 사라지게 되었을까?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자성은 100만군대를 이끌었다. 만일 50만병사, 50만마필의 수량으로 계산한다면, 사람은 매일 1되(升)의 조(粟)를 먹고, 말은 매일 3되의 조를 먹는다. 이것은 이 농민군은 매일 최소한 8천종의 조를 소비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매년 이어지는 전쟁과 군수물자징발, 전염병, 자연재해등으로 중국의 곳곳은 백골이 들판에 널려있고, 황폐한 마을이 부지기수였다. 그리하여 군량을 조달하는 것이 아주 힘들었고, 이자성마저도 "군수물자부족이 심각하다"고 할 정도였다.
군수조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자성은 <<약금령(掠金令)>>을 발표하여 군수물자를 모으고자 한다. 여기에는 군수물자를 기부하는 액수를 "구경(九卿)은 오만, 중승(中丞)은 삼만, 감사(監司)는 이만, 주현장리는 절반"으로 하였다. 추향(追餉, 군수물자납부독촉)은 종종 형벌을 수반했다. 대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추향이었다. 많은 형벌도구들을 대순군은 모두 사용했다.
이자성은 3월 19일 북경에 진입한 후, 계속하여 그의 "조향(助餉, 군수물자조달)"정책을 시행했다. 중앙에는 "비향진무사(比餉鎭撫司)"를 두었다. 조향액에 대하여는 "중당은 10만, 부원경당금의는 7만 혹은 5만, 3만, 도과이부는 5만, 3만, 한림은 3만, 2만, 1만, 부속이하는 각 천단위로 한다" 이를 위하여, 이자성은 부하에게 오천개의 협곤(夾棍)을 만들게 했다. 협곤은 나무의 모서리를 가다듬지 않았으며, 못까지 박은 것이었다. 이것으로 때리면 뼈가 부서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협곤의 위세아래에서 조향은 아주 순조로웠다. 예를 들어 가정백(嘉定伯) 주규(周奎)는 70만을 내놓고, 집안이 몰수될 때 다시 은53만냥, 잡기와 비단은 수레로 실었다고 한다. 대학사인 진연(陳演)은 4만을 내놓았는데, 나중에 다시 은 수만, 황금 360냥을 찾아내서 몰수 당했다. "협곤으로 백관을 협박하여 집안재산이 만에 이르는 자는 2,3만이상을 내놓았다. 숫자에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다시 엄하게 때렸고, 포락의 형을 가하니 아주 참혹했다. 죽을때까지 형을 가했다" 곡성이 거리마다 흘러나왔다. 돈을 낼 능력이 되지 않는 관리는 전문관점표호에 가서 차용증을 써주고 돈을 빌렸다. 이를 "대장(貸贓)"이라고 했다. 점주와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에서 노략한 돈이 은으로 약7천만냥이라고 했다. 실제로 노략한 것은 더 많았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평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대부를 구금하고, 협곤을 사용하여 돈을 빼앗으니 이는 고금에 보지 못한 일이고, 고금에 없던 참혹함이다" "예로부터 망국의 포로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았지만, 형벌을 가하고 고문을 가해서 돈을 빼앗는 일은 내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문구에서도 이자성의 대순정권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사서에 의하면, 당시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에 진입할 때 군기가 엄했다고 한다. 백성의 물건을 빼앗거나 간음하는 자는 즉시 능지처참에 처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얼굴에 "순민(順民, 대순의 백성)"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음식을 싸들고 향을 태우면서 거리로 나와서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 진입하는 것을 맞이했다고 한다. 상인들도 영업을 그대로 하고, 길거리도 보통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순의 장병들은 길거리에서 함부로 당나귀와 말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북경에 들어온 후 대순군의 고위장령들은 귀족의 호화주택을 나누어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서 살았다. 중하급장교들까지도 중하급관저나 부자들의 집을 빼앗아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처첩도 같이 빼앗았다. 대순군중에서 북경에 들어온 사람은 약 40여만명이었고, 북경에서도 농민군을 계속 모집하여 병사를 양성했다. 이때부터 이 40여만명의 대순군병사들은 민가에 분산되어 더이상 군대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니, 주민들에게 가한 불법행위가 어느 정도 되었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북경에 들어온 대순군사들은 향락에 빠지고, 주색에 탐닉했다. 그들은 궁중의 궁녀들을 전리품으로 나눠가졌을 뿐아니라, 평소에도 연자후통의 우령(優伶, 배우), 연동(孌童, 미소년)들을 수십명 불러다가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기쁠 때는 상으로 돈을 내렸고, 기분나쁠 때는 죽여버리기도 했다. 여러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고, 말 한마디라도 잘못 내뱉으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리웠고 피가 연회석을 적셨다. 윗사람들이 이러니, 아랫사람들도 그대로 배우게 된다. 병사들도 주민들 주택을 빼앗아서 솥을 빌려달라는 것은 적은 일이고, 침상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처와 딸과 자매를 짝으로 빌려달라고 한다. 숨기면, 남자를 붙잡아놓고 사방을 수색하니 내놓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음에 들면 안아서 말 위에 싣는데,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따르더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한 사람이 여러 남자를 상대하고자 하지 않으면 역시 죽인다. 안복후통에서 하룻밤에 부녀 370여명이 죽었다. 투항한 관리의 처첩도 모두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대순의 병사들은 주민의 집에 살면서 남자들에게는 말을 먹이도록 하고, 여자들에게는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게 했다. 돈을 수색하고 집안의 땅을 파기까지 했다. 여자아이의 나이가 12,3이 되거나, 부녀의 나이가 50이 되더라도 모두 액운을 피해가지 못했다. 북경바깥의 대순군이 점령한 곳은 모두 이러했다. "적병이 지나가면 먼저 민간부녀를 요구했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병사들은 바로 칼을 아무렇게나 내리쳤으니, 관리들의 고통을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예쁜 여자는 빼앗아 가고, 못생긴 여자는 버렸다. 부녀들의 고통이 이와 같았다. 살아남은 자가 적고, 죽은 자들도 깨끗하게 지키지는 못했다"
이런 부대라면 비적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대순군이 자행한 살육과 약탈중에 주민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연좌제까지 적용했다. 그들은 10집안을 1보(保)로 하여, 만일 1집안이라도 도망치면, 10집안을 모두 죽였다. 10집안중에 부유한자가 있으면 고위장령이 몰수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고, 중하의 집안에 대하여는 일반병사들이 나누어 가졌다. 민간의 말이나 당나귀 동기는 모두 병영으로 징수했다. 이와 같은 약탈행위를 주민들은 "보물찾기"라고 불렀다. 대순군은 또한 고민(告緡)의 법을 잘 이용했다. 그들은 각 아문에서 사람을 붙잡아 심문할 때, 그가 어느 관리가 돈을 어디에 숨겨두었다는 것을 불도록 하였고, 불기만 하면 그 관리를 바로 붙잡아와서 족치고 엄한 형벌과 고문을 가했다. 이어서 시정의 무뢰한들을 동원하여 관리들이 숨긴 재물을 찾아내게 하고, 찾아내면 그들에게 상을 주었다. 졸지에 소인배, 무뢰한들이 득시글거렸고, 서로 앞장서서 고발을 했거나, 이 기회를 틈타 복수를 하거나, 칼을 들고 재물을 약탈했다. 3월 22일부터 약탈행위가 시장되었는데, 십여일만에 대순점령구는 북경성을 비롯해서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이자성의 "산적두목" 기질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인 책략이나 정치적인 권위를 세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는 일마다 산적같은 일만 저질렀다.
사실, 명나라의 폭정아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이야 대순군이 와서 백성을 구해주기를 바랐었다. 대순군이 북경에 진입하기 전에 북경의 민중들은 "매번 적군이 북경성으로 다가오다고 하면 우리가 바로 문을 열고서 맞이했다. 이것은 사사로이 어떤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볼 때, 백성들은 처음에 대순군을 아주 잘 받들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앞문으로 호랑이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오는 것을. 이 굶은 이리는 호랑이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잔폭하다. 그리하여 당초의 "순민"들이 대순관병을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대순의 잔폭함은 우선 민중들 사이에서 "옛날만 못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4월 14일, 어떤 사람이 서장안가에 "사시(私示)"를 붙였다: "명나라의 운수는 아직 다하지 않았다. 충성을 바치고 싶은 사람은 이번 20일 동궁(태자)을 황제로 세우고, 의흥으로 연호를 고친다"라는 내용이었다.
유종민(劉宗敏)은 이 내용이 붙은 부근의 수십 집안사람들을 죽여버렸지만, 새로운 "사시"는 계속 출현했다. "사시"의 내용은 비록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북경시민들에게는 동원령이 되었다. 그래고 대순에 있어서는 선전포고에 다름아니었다. 4월 15일 북경내에서 "유언비어"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우금성(牛金星, 대순의 재상)은 대순의 관리들에게 "각자 조심하고 바깥출입을 삼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명나라의 투항한 관리들은 모두 마음이 돌아섰고, 기회를 틈타 도마칠 생각만 하였다. 이어서 기회만 있으면 난을 일으켰다. 이것들은 모두 대순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었다. 대순군이 패배하자, "순민"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4월 26일 이자성이 북경성에서 패퇴한 후, "그의 부하들이 노략질과 음행을 저질러, 어느 집도 악운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약탈한 물건은 수레에 바리바리 싣고서 서쪽으로 향했다. 수레와 말이 수십리에 이어졌다. 대순의 병사들중에서는 혼란을 틈타 도망치거나, 백성들에게 맞아죽은 자가 수만이었다. 당시 북경은 불바다가 되었는데,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대순군의 포악함은 또 한번 "민심을 얻는 자는 도움을 많이 받고, 민심을 잃는 자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결국 북경의 정치무대에서 쫓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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