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은 몽고족인 보얼지지터씨로서 청태종의 비(妃)이고, 순치제의 모친이며, 강희제의 조모가 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황제위에 오른 순치제와 강희제를 도와 청나라의 중원진출초기에 나라의 틀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세운다.
청나라때 권력을 움켜줬던 태후로는 청초의 효장과 청말의 자희(서태후)를 꼽는데, 효장은 자희와는 달리 직접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수렴첨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관련하여 해결되지 않는 하나의 의문은 그녀가 청태종의 동생이자 순치제가 어릴 때 섭정왕을 지낸 도르곤에게 재가(소위 太后下嫁)하였느냐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효장이 도르곤에게 재가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몇가지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황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정치적인 혼인이 필요했다. 청태종이 죽을 때 효장은 32세였고, 6세에 불과한 아들 복림(순치제)이 등극하였다. 하나는 30여세의 과부이고, 하나는 6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당시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던 사람은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그는 병사를 장악하고 있었고, 심지어 황제의 옥새까지도 도르곤의 예왕부로 가져가서 사용하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언제든지 폐위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효장이 순치제의 황제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청태종의 동생인 도르곤에게 시집갔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둘째,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은 만주족의 관습이었다. 옛날 만주족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서모를 취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형제지간, 숙질지간에 처첩을 서로 취하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생각한다면, 젊어서 과부가 된 효장이 젊고 뛰어난 도르곤과 결합한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셋째, 도르곤의 "황부(皇父)"라는 호칭. 태후하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중에 하나는 순치황제때 도르곤은 공개적으로 황제의 부친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도르곤의 칭호는 기록상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에서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다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변화했다. 황제의 모친이 시집오지 않고서는 도르곤이 황제의 부친을 자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르곤의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이 바로 태후와 도르곤의 혼인을 숨기다가 공개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넷째, 황제유지에 나와 있는 글에서 나타나는 사실. 순치17년(1660년) 12월 24일 유모 이씨가 병으로 죽자 순치는 예부에 유지를 내리는데, 그 안에 이런 말이 있다. "예친왕의 섭정때, 황태후와 짐은 궁을 나누어 거주했다. 매번 몇달이 되어서야 겨우 한번 얼굴을 보았다."는 문구가 있다. 어릴 때 순치제는 모친인 효장과 다른 궁에 살수밖에 없었고, 몇달에 한번 얼굴을 보았으며, 효장도 마음대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르곤을 뺀다면 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 것같다.
다섯째, 풍수장에 관한 사실. 청나라의 장례제도에 따르면, 황후와 비빈은 모두 황제와 합장하였다. 그런데, 효장은 심양에 묻혀있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존화에 있는 청동릉에서도 풍수장(담장) 바깥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를 그녀가 도르곤에게 개가하였기 때문에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강희제때 죽는데, 그녀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말고 청동릉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강희제는 선례가 없어 이를 처리하지 않고 효장의 시신을 38년간 동릉의 잠안전에 모셔두게 된다. 결국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가 처리하는데, 풍수장의 바깥에 그녀를 묻고 만다. 청동릉에 잠든 5명의 황제, 14명의 황후, 136명의 비빈은 모두 풍수장(담장) 안에 묻혀 있는데, 효장황태후만 유일하게 풍수장의 바깥에 묻혀 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여섯째, 어떤 사람은 "태후하가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1946년 10월 유문흥이 쓴 <<청초황부섭정왕도르곤기거주발>>에 보면 선통원년(1909년), 그의 부친인 유계서는 내각시독학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명을 받아 내각창고의 기록을 정리하다가 "순치때의 태후하가황부섭정왕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곱째, 장황언의 시. 남명정권의 관리를 지낸 장황언이 건이궁사(建夷宮詞) 10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두 수에 태후의 결혼에 관련된 내용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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